1987년 대한항공 KAL(칼)858기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전두환 정권이 바레인에 붙잡혀 있던 김현희(사진)를 대선 전에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던 정황이 31일 외교부가 공개한 25만쪽 분량의 1987~1988년 외교문서를 통해 공식 확인됐다. 대선 전 김현희를 송환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아예 바레인에 잔류시키는 방안도 고려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1987년 11월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 비행기가 실종되자, 전두환 정권은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하치야 마유미)가 붙잡혀 있던 바레인에 박수길 당시 외교부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했다.
12월8일 박 차관보는 주바레인 미국대사관 쪽이 제공한 언론인 제보를 보고했다. ‘바레인 외무장관은 하치야 신이치와 마유미가 바레인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하며 사용했던 앰풀 독약물이 반드시 북괴제조라고 단언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마유미가 칼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레인 외무장관은 12월9일 박 차관보와 면담에서 “(마유미) 인도문제 해결에 적극 협조하겠다”면서도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마유미의 신원확인 등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한국 쪽이 문서로 제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현희를 대선 전 송환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막판까지 바레인 쪽은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박 차관보는 “마유미가 늦더라도 (1987년 12월)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비행기의 내왕시간을 고려하는 경우 12일까지는 인도통고를 주재국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며 “시일이 천연될 경우에는 차라리 바레인 정부가 조사처리 하라는 식으로 손을 터는 문제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해 12월16일 대선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박 차관보는 바레인이 애초 합의한 김현희의 이송(12월13일 저녁 8시)을 5시간 앞두고 연기를 통보하자 “우리도 국내 사정으로 말미암아 마유미를 언제나 인수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라며 바레인 쪽을 압박하기도 했다. 결국 하루 뒤 이송이 승인돼 김현희는 전두환 정부 계획대로 대선 전날인 12월15일 한국에 도착했다. 전두환 정권이 이 사건을 대선에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황은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공개한 문건 등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김지은 박민희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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