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악순환의 폐쇄회로’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레이더·초계기 갈등, 일본 교과서 문제 등이 잇따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갈등의 뿌리에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들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를 거부하고 있고 일본 정부는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 체제를 흔들고 있다고 비난하며 ‘보복조처’를 입에 올리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이 되레 피해자인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한-일 관계는 과거사와 일반 현안을 분리해 투트랙으로 대응한다’는 원칙만 반복할 뿐, 뾰족한 해법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본 기업이 계속 배상을 거부하고 한-일 정부가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면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가지다.
첫번째는 피해자들이 압류 재산 매각에 나서고, 일본이 경제 보복으로 맞서는 상황이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가 언급한 보복 관세, 송금·비자 발급 제한 등의 조처는 일본에도 피해가 가기 때문에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 내 한국 기업 자산에 대해 같은 금액만큼 압류-매각(현금화)하는 ‘대항조처’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대항조처’와 우리의 보복조처가 이어지면 자칫 한-일 간 ‘경제 전쟁’으로 옮아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두번째는 한-일 정부와 기업들이 참여하는 재단을 설립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익을 본 한국 기업과 일본의 ‘전범기업’들을 중심으로 다른 기업들도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아베 신조 정부와 일본 기업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이상갑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과와 배상인데, 가해자는 빠지고 한국 정부와 기업들만의 재단 설립과 배상에는 다들 반대한다”고 말했다. 배상을 요구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규모를 예측하기 어렵고, 자칫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는 우려도 걸림돌이다.
세번째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 의한 해결이다.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최근 일부 한-일 관계와 법률 전문가들은 이 방안이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이 열린다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시켰는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지만, 일본 식민통치의 불법성까지 따져 묻는 ‘세기의 재판’이 될 수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일본 재판부도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다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고, 강제징용이 ‘준노예제’에 해당한다고 보는 법률가들도 있어 한국의 승소 가능성이 높다”며 “판결까지 4년 정도가 걸리는데, 식민통치의 적나라한 실상이 국제적 이슈가 되는 데 부담을 느낀 일본 쪽이 화해를 요청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패소할 경우의 후폭풍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정부는 ‘신중한 대응’을 강조하지만, 시민단체 쪽에서도 ‘속수무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상갑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뺏기고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정부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며 “해결 과제는 정부의 몫인데, 대안을 내놓으려는 노력은 없이 피해자와 재판부에만 부담을 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6월 말은 한-일 관계 정상화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9일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물밑 대화가 진행 중이며 상반기 안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물밑 대화로 상황 악화를 막으면서,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전환점을 마련하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몇달 안에 모멘텀을 마련하지 못하면 피해자들이 압류 자산 매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도 지나치게 한국을 자극해 역효과가 나는 것을 피하겠다는 전술적 판단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자산 매각에 나서면 자국 내 여론을 고려해 실제로 보복조처에 나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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