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북한 주석이 호치민 베트남 주석을 만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2013년 11월 평양 경상유치원 호지명(호치민)반에 걸렸다. 연합뉴스
오는 27~28일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겐 매우 특별한 나라다.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에 대한 김 위원장의 관심이 각별한데다, 김일성 주석 시절 함께 전쟁을 치르면서 맺은 두 나라의 우호관계 역시 중국과의 그것 못지않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혈맹이라면 북한과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의 혈맹이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호치민 주석이 이끄는 북베트남에 무기 10만정과 군복 100만벌을 지원하고, 전투병력인 공군을 파견했다. 이 무렵 중국도 9만정의 총과 공병을 지원했다. 한국 역시 미국의 맹방으로서 남베트남을 도우려 참전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한국과 미국, 중국과 북한이 편을 이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른 셈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종전선언과 관련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베트남전쟁의 이런 역사성이 새삼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전쟁으로 바라봤다. 김일성 주석은 1964년 1월 <노동신문>에 실은 '민족해방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자'라는 제목의 노작에서 베트남전쟁을 “전체 사회주의 진영의 안정과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는 것은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리요 의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1966년 9월 지원병 파견에 공식 합의했다. 북한이 전투기 10대로 구성된 공군 부대를 우선 지원하고, 1966년 말부터 1967년 초까지 지원병을 추가한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북한군을 '지원병'으로 부른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뛰어든 인민해방군을 ‘지원군’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1966년 10월 베트남전쟁 지원 부대를 찾은 김일성 주석은 “영웅적 조선인민군답게 싸움에서 누구보다도 용감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북한 공군이 치른 전투 가운데 1967년 5월20일 하노이에서 펼쳐진 공중전이 유명하다. 당시 미군 전투기 32대가 하노이 상공으로 날아오는 것을 포착한 북한 공군은 전투기 8대를 출격시켰다. 북한 공군은 이 공중전에서 미군 전투기 12개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북한 지원병들은 2002년 북한으로 넘겨져 '조선인민군 영웅열사묘'에 묻혔다. 외국기업들의 투자가 몰리는 하노이 인근 박장성에는 이들을 기리는 묘비가 남아 있다.
북한과 베트남은 전쟁 이전부터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호치민 주석은 1950년 1월14일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을 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당시 리주연 중국 주재 북한대사를 통해 박헌영 외무상에게 전달됐다. 북한이 31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내각의 결정을 베트남에 통보함으로써 두 나라는 정식으로 수교했다. 북한은 같은 해 8월 베트남의 반프랑스 투쟁을 지지했고, 베트남은 1952년 7월 '조선전쟁 기념대회'를 열어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의 철수를 결의했다.
북한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는 1957년 7월 호치민 주석의 방북과 1958년 11월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으로 절정에 오른다. 김일성 주석을 맞은 호치민 주석은 "나는 우리가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형제들과 경쟁하자고 제의한다. 경쟁은 베트남 인민과 조선인민의 단결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과의 관계를 혁명적 의리, 동지적 우의, 국제주의의 발현으로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북한과 베트남의 혁명적이고 동지적인 관계도 굴곡을 겪었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북한은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평양과 하노이에서 대사들이 철수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북한과 베트남은 1984년 대사 관계를 복원했으나, 1992년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다시 소원해졌다. 베트남이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95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우호관계도 형식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7년 호치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 득 마잉 총비서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면서 관계 회복의 전기를 맞는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공항에 직접 나가 영접하는 파격을 과시했다. 베트남은 이후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잇따르자 국제적인 제재 대열에 동참했지만, 일관되게 대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을 지지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한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한층 가까워졌다. 김 위원장이 경제집중 노선을 선택하면서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지난해 11월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서 “김 위원장이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베트남 모델’로 가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며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베트남 모델은 체제 유지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김 위원장이 선호하는 모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11월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 60주년에 맞춰 리용호 외무상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2015년 창건 85돌을 맞는 베트남 공산당에 보낸 축전에서 “우리 두 당,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전통적인 친선협조관계가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한 한길에서 더욱 강화, 발전되리라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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