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자민당의 연례 전당 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는 모습 그래픽.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라며 범죄 피해자로 묘사하면서도, 누구의 범죄였는지는 밝히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당시 일본군 지시 아래 위안소 운영을 맡았던 민간업자들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일본 정부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해 보려는 ‘꼼수’가 깔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아베 총리는 27일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이그네이셔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신매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신문은 아베 총리가 일본어로 말한 ‘인신매매’ 표현을 영어 ‘휴먼 트래피킹’(human trafficking)으로 번역해 실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인신매매’라는 일본어는 부모나 민간업자에 의한 매매를 연상시키는 단어”라며 “반면, 영어 ‘휴먼 트래피킹’은 강제연행도 포함하는 용어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공식 견해에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총리는 이런 느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미국 정부와 같은 용어가 되도록 ‘인신매매’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가 일본 정부의 강제동원 책임을 희석시키는 일본 단어를 쓰면서도 영어로는 속내를 감출 수 있게끔 의도적으로 단어를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아베 총리가 인신매매의 주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도 같은 맥락의 논란을 낳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인해온 기존 입장을 교묘하게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는 28일 “(아베 총리의 언급이)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민간업자들에게 돌리고 일본 정부의 관여와 책임을 부인하려는 의도에서였다면, 이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것으로서 피해자분들이나 우리 정부, 국제사회로부터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또 “역사상 많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거기서 여성들의 인권이 침해됐다”고 말했다.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데 왜 일본만 비난을 받아야 하느냐는 항변으로 풀이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아베 총리는 “아베 내각은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군의 책임과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를 재검증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고 덧붙였다.
미국 의회는 다음달 29일 상·하원 합동연설에 아베 총리를 초청하면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전향적인 태도를 밝혀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외현 기자, 워싱턴/박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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