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왼쪽 사진)가 16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의 질문을 들으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같은 날 오전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가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중 차관보 협의 중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인천공항/이종근 기자, 이정아 기자 root2@hani.co.kr
‘신중처리’ 공식입장보다 수위 높여
외교부선 ‘기본입장 오갔다’ 해명
권영세 “중, 사드반대 발언 종종 했다”
외교부선 ‘기본입장 오갔다’ 해명
권영세 “중, 사드반대 발언 종종 했다”
“(사드의 한국 배치와 관련해) 중국의 관심을 중시해주기 바란다.”
‘단도직입’이었다. 16일 한-중 외교차관보 협의를 마친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는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 앞에서 미국 사드(THAAD·종말단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와 관련한 중국 입장을 밝히는 데 에두름이 없었다. 류 부장조리는 중국어로 “관심”이라고만 말했지만, 중국 외교부 소속인 통역은 “관심과 우려”라며 강도를 높였다. 류 부장조리는 “우리(중국)는 미국과 한국 쌍방이 사드 문제에 대해 타당한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런 발언 수위는 중국이 기존에 내놓은 “신중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를 희망한다”는 공식 입장(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웃도는 것이다. 사실상의 ‘외교적 압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사드 문제를 논의했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아주 솔직하고 자유로운 소통을 진행했다”고 답했다. 외교가에서 ‘솔직하다’는 표현은 정제되지 않은 거친 의견 표출을 뜻할 때가 많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 쪽 발언 수위가 꽤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드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한국 가입 등 외교 현안을 둘러싼 미-중 두 강대국의 고위급 외교전이 서울에서 시작된 16일, 이처럼 포문은 중국이 열었다. 전날 방한한 류 부장조리는 이날 오전 10시33분 정부서울청사 별관에 도착해 협의에 나섰다. 회의는 점심시간을 넘겨 12시40분께야 끝났다.
류 부장조리의 이번 방한은 지난해 12월초 이경수 차관보의 중국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애초 일찌감치 예정된 의례적인 방한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중 간에 사드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등 현안이 부각되면서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류 부장조리는 작심한 듯 이날 오후 늦게 국회에서 나경원 외교통일위원장과 만나서도 사드와 관련한 중국의 우려를 거듭 제기했다. 차관보 협의에 앞서 따로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할 정도로 여론전에서도 적극성을 띠었다.
‘전략적 모호성’을 주장해온 한국 정부는 ‘기본 입장’이 오갔을 뿐이라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사드 문제는 한-중 간 공식 의제나 현안이 아니다”라며 “(전체 협의 가운데) 5분을 넘지 않은 걸로 안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자들이 주중 한국대사관 등을 통해 사드 관련 우려를 전해왔다’는 이날 일부 매체의 보도에 대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소설 같은 걸 쓰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며 부인했다. 하지만 권영세 전 중국대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중국이 (대사 시절) 종종 만날 때 사드의 한국 배치에 부정적이라는 뜻은 전달했다”며 결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위협적 언사가 동원되진 않았어도 직선적인 반대 의사 전달이 비공식적으로나마 자주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날 한-중 차관보 협의에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가입에 대한 의견 교환도 있었다. 중국 쪽이 한국이 ‘창설 멤버’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한 데 대해, 한국 쪽은 “경제적 실익과 지배구조 및 은행으로서의 요건을 검토하면서 결정해나갈 것”이라는 다소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같은 날 오후 1박2일 방한 일정을 시작한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공항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우선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만날 것”이라면서도 “한국 외교부에서 다양한 범주의 동맹 관련 이슈에 대해 많은 회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 피습을 계기로 부쩍 열이 오른 ‘한-미 동맹’을 강조함으로써, 사드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문제에서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는 데 대한 경계 메시지를 에둘러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러셀 차관보는 이날 류 부장조리를 만난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를 17일 오전 만난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가입에 대한 미국 쪽의 우려를 전달하고 사드 배치와 관련한 한국 쪽의 의견을 타진하는 등 한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대중국 외교전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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