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일본이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를 지난 20일 발표하면서 당시 한국 정부와의 ‘대화 과정’을 일방적으로 상세하게 공개한 것은 국제적인 외교 관례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한-일 간의 신뢰마저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조처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를 보면, 일본 쪽은 대화 과정을 일체 비밀에 부칠 것을 먼저 제안하고 한국 쪽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일본이 먼저 ‘비밀 유지’라는 신사협정을 깨버린 것이다. 특히, 일본은 양국 실무자들끼리의 얘기까지 깨알처럼 공개했다. 또 한국 정부는 고노 담화 작성 전에 일본이 먼저 협의를 요청했다고 일관되게 밝히고 있으나, 일본은 이번 보고서에서 한국 쪽이 먼저 협의를 하자고 요청한 것으로 호도했다.
20여년 전이라는 비교적 ‘최근 일’인데다, 당시 외교 현장에 있던 외교관들이나 위안부 할머니 등 이해당사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도 민감한 외교 내용을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세세하게 공개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기껏해야, 북한이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지난 2011년 6월1일 국방위원회 대변인 명의로 남북간 비밀 접촉 과정을 공개하면서 당시 남쪽 접촉 당사자인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등이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 망신을 당했다”고 한 정도다.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 과정에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대화록을 공개하기는 했지만 이는 국내 정쟁과 관련된 것이다. 그만큼 ‘정상국가’ 간의 외교 협상 공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 셈이다.
이에 따라 향후 한-일 외교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신뢰가 무너지면서 실무자든 고위급이든 양쪽 국가 모두 대화 내용이 공개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해 공식적이고 정제된 발언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물밑 교섭과 허심탐회한 속내까지 해야 하는 외교의 설 자리가 없어진 셈이다.
이용인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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