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윤석열 대통령이 추구하는 ‘가치 외교’라는 건 상당히 제멋대로(arbitrary)인 것 같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경제적 실용주의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포옹하지 않나.”
6·15 남북 정상회담이 23주년을 맞은 15일(현지시각)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열린 강연과 이후 이어진 <한겨레>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의 이른바 ‘가치 외교’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이 발언은 청중에서 ‘윤석열 정부가 일본 등과의 협력에서 보여주듯 가치 외교를 하고 있는데, 이를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말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문 교수는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지낸 국제정치와 한반도 문제 전문가다. 이날 강연은 모두 영어로 진행됐다.
문 교수는 윤 대통령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등 현 정부 인사들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면서 “(자신들은) 일본과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에 안보 분야에서 협력한다고 말하는데, 모순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이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독재 국가인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만나고, 사실상 일당 독재 국가인 베트남을 방문한 사례를 들었다. 문 교수는 “사실상 윤 대통령의 가치 외교라는 건 북한, 중국,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면서 “윤석열 정부도 가치외교과 실용외교를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미국 일각에서도 이를 ‘이상주의 외교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라고 말했다. 현 정부가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북한과 중국 등에 대한 강경 발언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문 교수는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나타나는 북한-러시아 관계를 어떻게 진단하는지 묻는 말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보낸 축전에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조’를 긴밀히 하겠다는 취지의 말이 담겼다”라며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가 걸린 문제인데 북한이 러시아에 대해 일방적 지지 표명하는 것은 크게 자충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왜냐하면 북한은 러시아의 필수적인 일부분이 된 듯 보이고 북한이 (향후) 이를 정당화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2일 러시아 국경절 계기에 김 위원장은 북한-러시아 관계가 “소중한 전략적 자산”이라면서 “선린 협조관계”를 강조한 바 있다.
빠른 시일 안에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협상이나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전망도 나왔다. 문 교수는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만큼 당장 미국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낮게 내다보면서 “올해 8월부터는 바이든 대통령이 어떤 이니셔티브를 선택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문 교수는 <한겨레>에 윤 정부의 “강 대 강” 대북 정책을 지적하면서 “윤석열 정부가 취임해서 1년 동안 30차례 걸친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를 통해 미사일을 74발을 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는 43차례, 미사일 수는 67발이다. 윤 정부 1년 동안 미사일 시험을 한 것이 문재인 정부 5년의 그것보다 더 많다”라고 했다.
문 교수는 “한-미가 연합 군사훈련을 하고 훈련 빈도와 강도를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북에서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한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라면서 “위기 안정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핫라인 직통 전화 재개해 소통 채널을 확실히 하고, 북한은 핵 미사일 시험 발사를 자제해 쌍방이 긴장 완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가 군사훈련 빈도를 줄일 필요성도 강조했다. 문 교수는 “오늘 남북 정상회담 23주년에 한-미가 유례없이 강한 화력 훈련을 한다고 하는 게 너무나 역설적”이라며 “이는 과거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라고 했다.
이른 시일 안에 협상이 이뤄지긴 어렵겠지만 문 교수는 여전히 “외교적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단 조건 없이 만나서 조율하고 좁혀나가야 한다”라면서 “한국이 (북한이 원하는 대로)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한도 한국, 미국의 말을 들어야 한다. 7차 핵 실험은 안 되고, 탄도 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 서해와 동해 비무장지대에서 우발적 군사 충돌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문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평화 안정을 위한 ‘동북아 6자(미·중·일·러·남·북) 안보 정상회담’ 또는 유럽연합(EU)까지 참여하는 ‘7자 회담’도 일종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동북아의 안보 지형의 변화 없이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6개국 정상이 만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동북아 평화 안정을 동시에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다만 현실적으로 미·중이 나설 가능성 적은 상황이기 때문에 유럽연합까지 참여시켜서 ‘촉진자’ 역할 맡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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