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가운데)이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면담을 했다. 왼쪽부터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 박 장관,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외교부 제공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두고 일본과 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고 기업(미쓰비시 중공업, 일본제철)은 피해 배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합의에 실패하면 정부가 먼저 한국의 최종안을 발표해 일본을 압박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2일 외교 소식통의 설명을 종합하면, 한·일 외교 당국은 강제동원 피해 배상에 일본 피고 기업이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막판 협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을 통해 피해자에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안을 주장해왔다. 정부는 그러면서 일본 쪽에 ‘성의 있는 호응’으로서 일본 피고 기업이 배상금에 참여할 것을 촉구해왔다.
그러나 일본 쪽이 피고 기업들은 배상금에 참여하지 않는 방안을 최종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는 일본과의 협상을 이어갈지를 두고 고심에 빠졌다. 한·일 외교 관계에 밝은 소식통은 “피고 기업이 돈을 내도록 한국 정부가 계속 압박했지만, 돈을 내지 않는 쪽으로 굳어지는 상황”이라며 “피고 기업 이사회에서 배임이라는 반발이 나온 것으로 안다. 피고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서도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를 배제한 채 한국 기업의 자금만으로 지원재단을 통해 배상을 진행하기로 할 경우, ‘한·일 정부는 피고 기업의 기부 참여를 촉구한다’는 최소한의 정치적 메시지를 발표하는 것을 한·일 양쪽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본 기업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라는 명칭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어 이런 방안 또한 최종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때문에 ‘제3자 변제’에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최종안을 한국 정부가 공식 발표해 일본 정부를 마지막으로 압박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일 양국은 최근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협상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양국이 지난달 18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외교장관 회담 후 다시 실무자인 국장급으로 낮춰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은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평소 일정을 공개했던 한-일 국장급 회담의 개최 여부를 비공개에 부친 것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피고 기업의 배상과 사과를 끌어내지 못할 경우 피해자 쪽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피해자를 설득하는 일에 최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나섰다. 지난달 28일 박 장관이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지 않고 서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 일본과 협의 경과 내용을 설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등 한-일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형 악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도 정부가 강제동원 협상을 서두르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1월 일본 정부와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은 올 봄이나 여름 오염수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해저터널 등 방류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른 정치적인 사안들과 달리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은 건강과 직결된 문제여서, 일본을 향한 국내 여론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큰 사안으로 꼽힌다.
신형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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