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의 핵심 메시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 강점이고, 강제동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핵심 메시지는 일본에선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거의 주목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애써 외면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핵심 메시지야말로 한일관계의 근본에 대한 커다란 ‘법적 화두’이기 때문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7월 펴낸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핵심은 ‘불법강점'이다>(지식산업사)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갓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정상화’를 강조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 마련을 위한 민관협의회를 출범시킨 무렵이다. 이후 정부는 9월까지 모두 네차례 민관협의회를 열었고, 일본 쪽과 각급 차원의 협의를 이어왔다.
정부가 한-일관계 정상화에 속도를 내는 최대 명분은 북핵·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등 안보협력 필요성이다. 이를 위해선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확정 판결 이후 수출 규제 등 일본 쪽의 보복 대응이 이어지면서 ‘수교 이후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대법원 확정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국내자산 매각(강제집행) 절차가 시작되면 “한-일 관계가 파탄날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가 무리수를 써가며 강제동원 배상 문제 해법 마련을 서두르는 이유다. ‘국익'을 내세워 피해자의 합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때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12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한일의원연맹 회장과 외교부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제동원 해법 마련을 위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정부 쪽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을 통한 이른바 ‘제3자에 의한 중첩적·병존적 채무 인수’를 사실상 최종 해법으로 제시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배상 책임을 진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채무’를 ‘제3자’인 지원재단이 인수한 뒤,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기업한테 기부금을 걷어 피해자들에게 대신 배상하는 방식이다. 김창록 교수는 지난 12일 오후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의 잘못된 주장과 행태를 정당화시켜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정부가 ‘제3자에 의한 중첩적·병존적 채무 인수’ 쪽으로 기운 것 같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본 기업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강점이고, 그에 따른 강제동원은 청구권 협정 적용 대상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니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결의 핵심이다. 윤석열 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면,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책임을 대신해선 안된다. 판결대로 집행해야 한다. 채무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해야 한다. 그걸 못하게 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나설 이유도, 명분도 없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가 고령이며,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원고 15명 가운데 생존자가 3명 뿐이란 점을 들어 해법 마련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집행 결정이 임박했을 때, 외교부가 결정을 늦춰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고령의 피해자가 대법원 판결로 얻어낸 권리를 실현하지 못하게 말린 것과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정당하게 맞서 바로잡아야지, 일본의 잘못된 행태를 바꿀 수 없는 전제로 여기고 우리가 맞춰야 할 이유가 뭔가? 일본이 파탄낸다고 한-일 관계가 파탄난다면, 한국이란 나라는 대체 뭔가? 일본이 잘못해도 일본에 맞춰야 한다면 한국의 외교는 뭔가? 참으로 황망한 일이다.”
—정부안은 사법부의 판결을 행정부가 뒤집는 모양새로 비춰질 수 있는데.
“헌법소원이 가능해 보인다. 정부의 처분이 이뤄지면,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싸워 얻은 정당한 권리(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른 배상)를 침해당하게 된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재산권과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처분이기에 위헌이다. 정부를 상대로 ‘권리실현 방해’에 대한 소송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얘기가 왜 필요하느냐란 생각이 든다. 국민들이 용어도 생소한 이런 걸 왜 따지고 있어야 하나. 정부가 일본 기업의 채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은 채무가 있다는 뜻인데, 판결에 따라 채무를 이행하도록 하면 될 게 아닌가.”
—지원재단이 채무 인수와 배상 과정을 주도하는 것도 법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단이 정관을 변경한 것은 윤석열 정부 들어 부쩍 늘어난 시행령으로 법률 뒤집는 것과 똑같다. 재단 설립 근거가 되는 모법인 ‘강제동원특별법’은 청구권 협정과 관련해 인도적 차원의 지원만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위 규정인 정관으로 법률이 정한 권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위법이다.
재단은 정부 기관이 아니고, 재단 이사장도 국가 공무원이 아니다. 재단에는 청구권 협정 수혜 기업을 상대로 기금을 모을 권한도 없다. 그럼에도 기금 출연을 요청하게 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강제동원은 청구권 협정과 상관없다. 따라서 강제동원에 관한 한 청구권 협정에 따라 수혜를 입은 기업도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수혜 기업 쪽이 기금을 출연하면, ‘배임’에 해당해 기업 내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조속한 해법 마련을 강조하며 밀어붙이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만적이다. 대위변제(제3자가 빚을 대신 갚는 것)는 채권자의 승낙이 있어야 한다.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가 채권자다. 당연히 승낙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럼 대위변제는 안된다. 이른바 중첩적· 병존적 채무 인수는 채무자인 일본 기업과 제3자가 약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 기업도 그 약정을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약정을 하게 되면 채무이 있다는 점, 곧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채무자가 약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채무 인수가 성립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되는 걸 되는 된다고 우겨 일단 피해자들이 돈을 받게 하려는 것 같다. 피해자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국민을 기만하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다.
만약 정부안 대로 시행하면, 일본 정부는 ‘우리가 완전히 이겼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란 점도,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점도, 식민지배는 불법강점이 아니라 합법지배란 점도 ‘한국 정부가 인정했다’고 할 것이다. 한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에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정신에도 반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