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서울을 찾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가 저울질 해 온 이른바 ‘대위변제’ 방식도 피해자 쪽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법률 해석이 나왔다. 피해자 쪽이 가해 전범기업의 사과와 배상 참여를 최소한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어, 18일 일본을 방문하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일본 쪽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7일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의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민관협의회 참석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 14일 열린 협의회 2차 회의에선 크게 3가지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첫째, 피해자 쪽 대리인단이 요구한 ‘피해자-피고 기업 직접 협상’을 위해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발동해달라는 문제다. ‘외교적 보호권‘이란 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해당국 정부가 외교절차 등을 통해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적절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다.
지난 2018년 10월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법 행위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외교적 보호권’도 살아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정부 쪽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가해 전범기업의 배상 판결 이행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대법원 판결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일본 정부 쪽의 ‘위법·부당한 대우’ 탓에 피해자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외교부 당국자는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국제법적인 ‘외교적 보호권’은 일본 사기업이 한 행위가 아니라 정부가 불법 행위를 했을 경우 여러가지 요건에 따라 우리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가해 기업에 직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는지를 따지지 않은 채, 미쓰비시 등 가해기업이 배상 판결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 강조한 셈이다. 피해자 쪽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정부는 직접 협상안에 대한 외교적 경과를 설명해줬으나, 기밀 사안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며 “지속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해달라는 외교적 보호권을 재차 요청했다”고 말했다.
둘째, 대법원 배상 판결 이행을 위한 재원 마련 방안도 논의됐다. 외교부는 2차 협의회에서 기존에 보도된 이른바 ‘대위변제’ 방식에 대한 법률적 검토 결과를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위변제’란 정부가 일본 기업이 내야 할 배상금을 피해자 쪽에 대신 지급하고 추후 일본 쪽에 청구하는 방식이다. 앞서 협의회 출범을 전후로 일부 매체는 일본 기업과 한-일 청구권 협정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을 조성하는 대위변제 방식을 정부가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협의회에선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위변제를 추진하더라도, 피해자 쪽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법률 해석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민법 453조와 454조는 “제3자는 채권자와의 계약으로 채무를 인수하여 채무자의 채무를 면하게 할 수 있다”며 “제3자가 채무자와의 계약으로 채무를 인수한 경우에는 채권자의 승낙에 의하여 그 효력이 생긴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배상 책임(채무)을 진 가해 전범기업을 대신해 정부가 어떤 형식으로든 배상을 하려면, 채권자(피해자)의 승낙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2차 협의회에서) 대위변제 관련 논의가 있었고, 법률 검토를 거쳐 채무를 누군가 대신 변제하기 위해선 채권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다”며 “이른바 ‘문희상안’을 특별법 형식으로 추진한 것만 보더라도 피해자 쪽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란 방증이란 지적도 나왔다”고 전했다.
‘문희상안’이란 지난 2019년 11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일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성금,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로 만들어졌다 해산된 ‘화해·치유재단’에 일본이 낸 기금 잔액 60억원으로 대신 부담하자는 방안이다. 이 재원으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가 지급되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이 ‘대위변제’되는 것으로 간주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는 논리였지만, 피해자 쪽 반발로 무위에 그쳤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가 지난 14일 오후 민관협의회 2차 회의를 마친 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핵심은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사죄로 모아진다. 2차 협의회에서도 사죄의 주체와 시기, 방식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오간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로 대법원 배상 판결을 이끌어 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 쪽 지원단체와 소송대리인단은 지난 14일 “가해자인 미쓰비시 쪽의 진솔한 사죄와 배상 이외에 다른 해결방안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며 협의회 불참을 선언했다.
임 변호사는 “대위변제는 결국 기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라며 “피해자 쪽에선 타협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면 그 기금을 만드는 데 피고기업의 참여가 필수적이며, 또 (일본 정부가 거부하면) 가해 기업이라도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는 피해자 쪽 입장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징용공(강제동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 한국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관련 대화 자체를 거부해왔다. 또 “한국이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며 “(전범기업 자산) 현금화는 한-일 관계 파탄을 뜻한다”고 을러댔다. 출범 직후부터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해 온 윤석열 정부의 노력도 18일 4년7개월여만에 열리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일본 쪽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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