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2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을 들고 일본 정부와 기업의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부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풀기 위해 꾸린 민관협의체가 4일 첫 회의와 함께 출범한다. 일부 피해자 단체는 정부의 추진 절차가 투명하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등 협의체 출범 전부터 삐걱이고 있다. 지난 2015년 졸속으로 추진된 ‘위안부’ 합의 때처럼 한-일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또다시 피해자들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방식이 되어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협의체는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이 주재하고 학계와 전문가 등이 참여한다. 정부가 협의체까지 꾸려 강제동원 문제 해법을 찾아 나선 것은 표면상으론 8~9월께로 예상되는 대법원의 일제 전범기업 국내 자산 강제 매각에 대한 최종 판결 때문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던 일본 쪽은 그간 “자산 강제 매각은 한-일 관계 파탄을 뜻한다”고 을러왔다.
보다 근본적으론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한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북한 핵·미사일 위협 대응을 위한 외교·안보정책의 핵심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법원 배상 판결 직후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 정상화의 전제로 일본 쪽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한국 정부가 해법을 가져와야 한다”고 압박해왔다. 한-미-일 3국 안보협력 강화를 위해선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강제동원 문제가 풀려야 한다는 일본 쪽의 구도를 정부가 고스란히 받아들인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 계기에 4년9개월 만의 한-미-일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마드리드/연합뉴스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3국의 인식엔 차이가 있다. 지난달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를 계기로 4년9개월여만에 성사된 3국 정상회의에서 미국 쪽은 북핵 문제를 포함해 인도·태평양 전반에서 3국 협력의 중요성을 거론했다. 3국 안보협력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중국을 겨냥해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하겠다는 뜻이다.
일본 쪽은 한-미-일 공동 군사훈련과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 등을 부각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넘어선 3국 안보협력의 외연 확장이란 미국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국방력 강화 등 자국의 안보적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반면 한국 쪽은 북핵 문제 대응을 위한 3국 안보협력을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정상회의 직후 자료를 내어 “3국 정상은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프로그램 진전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국제사회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며 “한-미-일 안보협력이 이날로써 복원됐다”고 전했다.
대통령실의 이같은 주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 한-일 관계 교착 속에 흔들렸던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가 윤석열 정부 들어 정상화했다는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3국 안보협력 복원’이란 국내 정치적 효과에 경도돼, 그 전제인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이 요구한 강제동원 문제 해법 마련용 민관협의체를 서둘러 추진하는 모양새가 됐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협의체 회의 출석 요청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같은 구도에 ‘들러리’가 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전문가들은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별개의 문제로 다루는 ‘투트랙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본 외교·안보정책 전문가인 이기태 통일연구원 평화연구실장은 “한반도를 넘어선 3국 안보협력은 국익에 입각해 세밀하게 따져볼 부분이 많다”며 “북핵·미사일 대응을 위한 3국 안보협력은 시급할 수 있지만, 다른 부분에선 3국 협력 복원이 가시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 있다”고 짚었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국내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 마련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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