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34회) 북한 농업대표단 미국 초청
박한식(앞줄 왼쪽 둘째) 교수는 1997년 9월 미국 정부 초청으로 처음 방문한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 6명을 이끌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세계적인 동물사료 전문업체 랠스턴 퓨리나(2001년 네슬레로 합병)의 본사를 견학했다. 박 교수와 팔장을 끼고 있는 사람이 단장(최아무개)이다.
내가 북한을 가장 빈번하게 방문했던 시기는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성사됐던 1994년 ‘제네바 합의’가 합의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파국을 맞으면서 북-미 간에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김일성 주석 사후 북한 체제와 사회에 어떤 변화가 감지되는지,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 공고화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현안들에 대해 나 나름대로 관찰과 이해를 모색하고자 북한을 자주 왕래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현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이었다.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 실컷 먹고 살게 해주겠다던 김일성 주석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굶주림에 신음하는 인민들로 나라 전체가 아우성이었다. 김일성 사후 식량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인한 공산권의 붕괴가 북한의 경제적 고립을 가속화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더해지면서 식량 생산에 갑작스러운 차질이 생겼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대기근을 일컫는 ‘고난의 행군’ 기간에 최소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참상이 발생했다.
박한식 교수는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목격하면서 식량난 해결과 농업 생산성 향상을 돕고자 북-미 농업 교류를 주선해 성사시켰다. 사진 연합뉴스
<길을 찾아서> 3회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부모가 굶어 죽어 탁아소에 맡겨진 아이들이 역시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내가 소학교 1년을 보냈던 평양의 한 마을에 가봤더니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비통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미안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나만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는 것 같은 생각에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비참한 광경은 나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나도 쌀밥 한번 구경해 봤으면 하는 소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적이 있었다. 1946~47년 평양 보통소학교 1학년 때 경마장에 가서 말의 사료로 쓰는 콩비지를 구해 먹고 살았다. 그 지독한 가난의 고통은 지금껏 생생히 남아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굶주리는 그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고들 했다. 내가 정부 관리도 아니고 빌 게이츠처럼 재산이 많아서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나는 북한의 식량 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침 내가 근무하고 있던 조지아대학은 미국에서 농업과 축산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아대 농대의 장점을 살려 북한의 식량난 개선과 농업 분야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주선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북한 관리들에게 조지아대학에 와서 농업과 축산에 대한 선진 기술을 배우고 습득해서 북한 농업에 활용해 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을 했다. 내 제안에 북한 농업과학원 관리들과 연구원들은 미칠 듯이 기뻐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미국을 방문해 선진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화답했다. 비록 미국이 북한의 적대국이기는 하지만 북한 사람들도 미국의 과학과 선진 기술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이 있었다. 정치적 부담이 있는 정부 간의 교류도 아니고 민간 차원인 대학과 대학 그리고 학자들 간의 교류 형식이어서 상당히 흡족해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북한 농업방문단의 조지아대학 방문을 추진했다. 하지만 두 가지 큰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다. 첫째는, 비용이었다. 나라 전체가 굶고 있는 북한 쪽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미국까지 오는 경비를 충당하기는 매우 버거워 보였다. 어떻게 그 많은 여행경비와 체재 비용을 마련할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비자였다. 비용이야 어떻게든 마련해본다 하더라도 과연 미국 정부가 외교 관계도 없는 적성국인 북한 관리들에게 방문 비자를 내줄지가 큰 복병이었다.
나는 우선 미 국무부에 요청해보기로 했다. 마침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과 북한 방문단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를 설득했다. 그는 부인도 한국인이었고 우리말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늘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점도 많았다. 그는 처음 있는 일이라 선뜻 비자를 발급해주겠다고 장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적 검토를 해보겠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국무부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북한 방문단의 여행과 체재 경비 마련을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섰다. 평소 나와 뜻을 같이하던 지인들은 물론 그들을 통해 조지아의 농업과 축산 관련 기업들한테 도움을 청한 결과 상당한 경비를 후원받을 수 있었다. 특히 조지아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골드 키스트’(Gold Kist)라는 닭고기 가공업체의 후원이 컸다. 회사의 창업자인 브룩스 회장은 조지아대 농대 동문이었고 북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흔쾌히 재정적 후원을 해주었다.
1997년 북한 농업대표단의 미국 방문을 후원해준 닭고기 가공업체 골드 키스트의 회장 데이비드 브룩스는 역대 미국 대통령 7명의 자문을 했던 농업정책 전문가였다.
조지아대학 동문인 골드 키스트의 데이비드 브룩스(왼쪽) 회장은 같은 조지아대학 출신인 지미 카터(오른쪽)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후원금이 어느 정도 채워질 즈음, 반가운 연락이 왔다. 미국 정부가 북한 방문단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의 방문을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북한 농업성과 농업과학원 관리들의 미국 방문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내게 좋은 사람들을 깊이 사귀고 교류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어찌 보면 사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이 미국 조지아주를 방문한 것은 1997년 9월이었다. 6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이었다. 방문단의 목적은 식량난 개선을 위해 필요한 종자 개발과 개량을 비롯해 선진 농업기술의 습득과 이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이들의 관심은 닭에 있었다. 양계산업 육성이 최대 관심사였다. 조지아대학이 양계 분야 연구에 있어서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지아주가 미국에서 가금류를 가장 많이 생산·공급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조지아주는 미국 전체 닭고기 소비량의 28퍼센트를 생산·공급하고 있었다.
1997년 학술 교류로는 미국을 최초로 방문한 북한 농업성과 농업과학원의 대표단은 특히 축산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한식(왼쪽 둘째)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농축산업지역인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일대를 함께 견학했다. 사진 박한식 제공
나는 과학과 축산은 잘 알지 못했지만 전해 듣기로는, 조지아대학의 농축산학과 교수인 닉 데일 박사는 갓 부화한 병아리를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식용이 가능한 닭으로 키워내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북한 방문단은 데일 박사의 연구에 큰 관심을 보였고 속성으로 닭을 사육해서 인민의 먹거리로 공급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방문단은 조지아대 농대에서 주최하는 여러 차례의 양계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고 특히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골드 키스트의 공장도 견학했다. 닭이 자동화된 컨베이어벨트를 지나 단 몇 분 만에 바로 요리할 수 있는 상태로 가공되어 나오는 현대식 공정을 보고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 방문단은 또한 데일 박사의 가금류 사료 연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동물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사료의 개발과 공급이 절실했다. 나는 북한 방문단을 인솔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퓨리나(Purina)의 동물 사료 공장도
견학했다. 퓨리나 쪽에서는 방문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고 북한의 사료 생산과 가공을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북한 농업과학원 방문단은 귀국길에 내게 특별한 부탁을 해왔다. 생닭을 몇 마리 북한으로 가져가 교배시키고 사육해서 인민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농축산물의 반입과 반출은 검역이 엄격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 대표단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그들의 심정은 절박했다. 나는 조금의 꾀를 내어 살아 있는 닭 대신 달걀을 가져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방문단도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생계란 10개를 그들이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때 기내로 가져갈 수 있도록 건넸다. 그 이듬해 북한을 방문해서 보니, 계란 다섯개는 귀국길 도중에 깨져 버렸고, 나머지 다섯개는 부화에 성공했지만 두 마리는 바로 죽었고 나머지 세 마리도 얼마 못 가서 죽었다고 했다.
조지아대학의 농축산학과 교수인 닉 데일 박사는 양계 전문가로서 북한 농업대표단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방북도 주저하지 않았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안타까운 마음에, 닉 데일 교수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왜 실패했는지’ 이유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데일 교수도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원인을 제시하는 데는 망설였다. 대신 그는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자신이 북한의 토양과 환경을 알지 못하니 닭들이 일찍 폐사한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고 따라서 북한의 성공적 양계를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해 농업과학원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이전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데일 교수의 진심에 감사했다.
2000년 10월 박한식 교수와 함께 평양에 간 게일 뷰캐넌 학장(사진), 농축산학과 닉 데일 교수 등 조지아대학 농대 대표단은 미국의 첫 북한 방문 학술단체였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나는 서둘러 조지아대학 방문단의 방북을 추진했다. 2000년 10월 농대 학장인 게일 뷰캐넌 박사와 닉 데일 교수를 포함한 농대 방문단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 학술 방문단으로는 미국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사례이며 앞서 1997년 북한 농업 방문단에 대한 답방 형식이기도 했다. 그들의 방문은 북한의 식량난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선의의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장기적인 농업 분야 교류·협력 그리고 무역에 대한 희망도 품고 있었다.
조지아대학 방문단은 방북 내내 학술회의 참석은 물론 대학과 농업 현장을 둘러보며 북한 농업성 관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데일 교수는 양계 관련 연구와 기술을 정성껏 북한에 전달해 주었다.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편견을 가지고 있던 미국 방문단은 조금씩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방문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던 미국 방문단과 북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국가 간의 적대적 감정은 사라지고 신뢰가 싹텄으며 앞으로 교류·협력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다. 조지아대학 방문단이 북한을 방문하던 시기에 마침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도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조율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고 있어서 그 기대는 한층 더했다.
2001년 5월 두번째로 미국에 온 북한 농업과학원 대표단(단장 김삼룡 부원장·사진)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를 방문했을 때 코카콜라 쪽에서는 인공기까지 내걸어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이듬해 2001년 5월에는 북한 농업과학원 방문단이 두번째로 조지아대학을 찾았다. 김삼룡 부원장이 인솔해 온 방문단은 이번에는 고구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북한의 식량정책은 쌀농사보다는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덜 민감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 생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조지아대 농대 방문단이 방북했을 때 북한의 토양과 기후가 조지아대학에서 개발한 고구마 재배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구마 생산 증대를 위한 조언을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지아대 농대는 그때 감자맛이 나는 고구마를 연구·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재배와 보급에 힘쓰고 있던 시기였다. ‘감자와 고구마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 지시가 있었던 터라 감자맛 나는 고구마에 대한 북한 방문단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비상했다. 북한 방문단은 지난번 계란처럼 품종개량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가기를 원했다. 누구보다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고 있던 터라 나는 농대에 부탁해 감자맛 나는 고구마의 종자를 건네주었다. 그 고구마가 잘 재배되고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의 식량난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기를 바란다. 조지아대 농대와 북한 농업과학원의 교류협력 양해각서가 체결되었고 두 기관의 교류를 활발히 해나가기로 약속하고 북한 방문단은 돌아갔다.
부캐넌에 이어 조지아대학 농대 학장을 맡은 스콧 앵글도 2008년 북-미 농업교류를 적극 추진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두 기관의 교류는 2008년 7월에야 이어질 수 있었다. 7년간이나 끊겼던 이유는 2002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이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그간의 교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정치적 긴장이나 현안에 민간 교류가 휘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정부 간 대화 창구가 막혔을 때일수록 민간 교류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민간 교류의 활성화가 정부 간 대화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미 학술교류는 2008년 조지아대학 농대 대표단의 방북에 이은 2011년 북한 과학자 대표단(단장 홍륜기 국가과학원 국장)의 조지아대학 방문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사진 연합뉴스
2008년 7월 나는 농대 학장 스콧 앵글의 요청을 받고 다시 조지아대학 방문단을 안내해 북한을 방문했다. 두 기관은 농업 분야 전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교류하고 또 북한의 농대 교육을 지원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아울러 북한 농업 전문가들을 해마다 조지아대학에 초청해 연수시키고 북한 농대생들의 조지아대학 유학도 추진하기로 했다. 2011년 2월 북한 방문단이 다시 조지아대학을 찾아왔고 2008년 합의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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