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 교수는 1965년 미국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북한의 당 공식 기관지 <로동신문>의 사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주체사상’과 ‘어버이 수령’ 등 특유의 용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북한은 1998년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주체년호(연호)’를 제정하고 생일인 4월15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 태양절’로 제정했다. 2012년 4월15일 김일성 탄생 100돌 때 <로동신문>은 1면에 ‘위대한 주체의 태양의 력사는 천만년 흐를 것이다’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사진 <연합뉴스>
내가 주체사상에 주목한 계기는 아메리칸대학 정치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시기에 마련되었다. 1965년 입학한 나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로동신문>의 ‘사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미국 상무부에서 주관하는 번역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상무부는 나에게 ‘비밀정보 사용허가’(Security Clearance)를 내주었다. 물론 아주 낮은 등급의 비밀정보만 열람할 수 있는 허가였다. 나는 국회 도서관 등에 가서 <로동신문>을 열람하고, 때로는 관련 부분을 복사해서 번역을 하곤 했다. 석사과정 내내 했으니 약 2년 동안 <로동신문>을 자세히 읽은 셈이다.
2012년 3월25일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돌을 앞두고 평양시 중구역 로동신문사 청사 앞에 새로운 영생탑을 세웠다. 기존의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를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바꿨다. 사진 <연합뉴스>
그때 내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부지불식간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동신문>과 같은 문헌자료만으로는 북한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적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무엇보다 <로동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체’, ‘주체사상’ 등과 같은 용어를 끊임없이 만나야만 했다. 북한 노동당의 기관지에서 유독 주체와 주체사상이란 용어를 그토록 많이 사용한다면 필경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해 보이는 주체와 주체사상의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서 정치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공부했고,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해서도 정치사상을 전공했으며, 석사학위 논문도 그 분야에 대해 썼다. 그런 나였기에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갈수록 타올랐다. 그래서 1971년 조지아대학에 교수로 부임한 뒤 북한에서 주체사상 연구를 대표한다고 알려진 황장엽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 한가지 <로동신문>을 번역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내가 점차 북한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나에게 북한 관련 질문을 하는 빈도가 차츰 늘어났다. 심지어 1974년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나를 ‘학자 외교관’으로 임명해주었다. 그런 다음 수시로 북한에 관해서 물어봤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미국에서 북한을 이해하는 수준이 얼마나 일천하면 나에게 자꾸만 질문을 한단 말인가? 내가 미국 사람의 눈에는 북한 전문가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나 자신은 <로동신문>의 내용에 익숙해질수록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박한식 교수는 <로동신문> 번역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미국 학계와 언론에서 ‘북한 전문가’로 알려져 관련 이슈가 생길 때마다 다양한 매체에 나가 의견을 밝히고 있다. 사진 <시엔엔> 화면 갈무리
그 시절을 회상하니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른다. 하루는 상무부가 요청한 <
로동신문> 사설을 번역해서 담당자에게 제출했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왜 어제 번역한 사설과 내용이 동일하죠?’ 내가 땡땡이를 친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내가 번역한 두 사설의 내용이 대단히 유사했을 뿐이다. 물론 상무부 담당자뿐만 아니라 누구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 밖에서 존재하는 나라다. <로동신문>의 사설은 항시 주체사상의 원칙에 따라 작성된다. 그 원칙에 따라 작성하다 보니 유사한 내용이 반복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더러 발간된 북한 관련 책자들도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방해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접한 북한 관련 책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북한을 이해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라 비난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은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밖에서 진행되는 북한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아무리 많은 오류를 범하더라도 현실적 검증이 무한히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풍토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지배적 여론에서는 북한을 ‘악마의 나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들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낙인을 찍지 않았던가? 물론 우리가 북한을 싫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상대하려면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이해의 지평은 오직 북한을 ‘탈악마화’(de-demonization)할 때에만 가까스로 열릴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탈악마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학문적 정신을 갖춰야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학자의 자격을 갖는다.
박한식 교수는 1981년 방북 이래 주체사상을 명확히 이해하고자 수많은 북한 사람들을 상대로 질문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연구방법론을 찾았다. 1993년께 평양 방문 때 대동강변 주체탑을 배경으로 찍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는 북한 밖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했다.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북한에 가보면 북한 연구를 방해했던 각종 장해 요소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북한 방문의 길을 열고자 수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 길이 열렸을 때 나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북한 땅을 밟는 순간 그 기대는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의 학문 세계가 작동하는 시스템은 한국이나 미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시내 곳곳의 서점에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서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의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서점은 아예 상상할 수도 없다. 한국에서 예컨대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는 미국 의회 도서관 등을 방문해서 수많은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는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없다. 한국이나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 가면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서적과 논문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대학 도서관에서는 주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서적들을 비치한다.
북한을 방문해도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서야 내가 생각한 북한 방문이 북한 관광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의사 면허증이 없는 사이비 의사가 청진기만 덜렁 들고서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허탈했다.
북한 연구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나는 마침내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나 홀로 북한 연구의 처녀지를 개척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내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각종 질문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따라 다양한 가설을 구성했다. 그때부터 북한 방문은 준비한 질문을 제기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알게 된 정치인들과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학자들과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인민들과 일상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준비한 질문의 안내에 따라 북한의 각종 기관, 유적지, 마을, 장터 등을 돌아다니면서 가설을 검증했다. 또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북한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내가 원하는 책들을 입수했다.
이처럼 북한 연구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북한에 대한 오해가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현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오해가 계속해서 방치되거나 조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적 삶의 조건이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화적 공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는 특히 오해가 많은 선군사상에 대해서 2010년 영문으로는 최초로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은 2007년 북한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책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 장군>.
김일성 사후 김정일 체제에서 강조한 선군사상, 선군정치에 대해 대내외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북한은 2012년 영문판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선군 폴리틱스 인 코리아>.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까지 내가 축적한 북한 연구에 따라 주체사상 관련 통념 몇 가지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적지 않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주체사상은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 그래서 선군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 낡은 주체사상을 대체했다는 것, 선군사상은 그 용어가 함축하는 것처럼 군이 인민의 삶을 선도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 등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군사상은 북한 밖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선군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자나 논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정치인, 군인, 학자 등에게 선군사상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 선군사상을 학술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얘기는 어디까지나 선군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미가공 데이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그 미가공 데이터를 학문적으로 가공해야만 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선군사상 관련 논문 두 편을 작성했다. ‘선군정치: 김정일의 북한 이해하기’(Military-First Politics ‘
Songun’:
Understanding Kim Jong-il’s North Korea, 2007), ‘선군정치: 북한 대외정책에 대한 함의’(Military-First ‘
Songun’ Politics: Implications for External Policies, 2010)가 각각 그것이다. 이 두 논문은 선군사상을 영문으로 소개한 최초의 논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제사회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박한식 교수는 폐쇄사회인 북한에 대한 서방권의 연구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선군사상은 주체사상과 별개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심화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먼저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사상을 확대시키고 심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사상은 김일성 시기에도 존재했다. 김일성 시기의 선군사상은 ‘국방에서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의미했다. 국방에서 자위는 인민이 군에 충실하게 복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김정일 시기에 선군사상의 의미가 확대되었다. 김정일은 2006년 핵무기 개발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 덕분에 북한은 군사력에서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일은 그 군사적 여력을 ‘경제에서 자립’이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을 실천하는 쪽으로 전용했다.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군에 충실하게 복무해야 한다. 그런데 경제에서 자립의 원칙은 군이
인민에게 봉사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농번기에 수많은 군 장병이 농촌에서 농민의 일손을 돕는 장면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하나 잘못된 통념은 주체사상을 조선 주자학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주체사상에서 중시하는 ‘어버이 수령’ 개념을 주자학에서 역설하는 효와 충의 맥락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주체사상에서 수용할 수 없다. 주체사상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당쟁과 사대주의 유산을 혁파할 수 있는 대안의 사상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조선 당쟁의 궁극적 원천은 주자학이었다. 조선은 한마디로 주자의 나라였다. 주자를 신봉한 조선의 역사가 당쟁과 사대주의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자는 효를 충보다 우선시했다. 다시 말해서 ‘수신제가’의 논리를 ‘치국평천하’의 논리보다 우선시했다. 예컨대 명·청 교체기의 와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도 효를 충보다 우선시하는 주자학적 신념 때문이었다. 인조반정 세력에게는 광해군이 외교를 잘해서 전쟁의
참화를 방지하는 것보다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가 더욱 심각한 죄목이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는 효와 충이 동등한 자격으로 ‘어비이 수령’에게 수렴된다. 따라서 주체사상에서는 효의 논리로 충을 폐기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주체사상의 ‘어버이 수령’을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를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시행된 ‘효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무제는 효를 제국의 통치술로 활용할 것을 역설한 <
효경>(孝經)을 참조하면서 효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
효경>에서는 “부자간의 도는 천성이며, 군신의 의리이다”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효와 충의 수렴을 강조한다. 따라서 <
효경>은 효를 강조한 유가적 경전이지만, <충경>(忠經)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법가적 성격을 지닌 경전이었다.
북한은 효와 충이 수렴되는 어버이 수령이 지배하는 국가라고 할 때, 2500만 식구를 가진 하나의 거대한 가족국가가 곧 북한이라고 할 수 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