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7월 북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한 재미 한국인 학자 6명 일행이 평양시 대성구역 용남동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교수들과 토론을 하고 도서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오른쪽 둘째 양성철, 다섯째 박한식, 여섯째 김종익, 아홉째 길영환, 앞줄 가운데 고병철, 맨 오른쪽 이채진 교수 등이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1년 북 해외동포원호회 ‘문호 개방’
그해 7월 재미동포 학자 6명과 평양에
결혼 잔치·대동강변 연인들 데이트…
“똑같은 사람들 보고 ‘반공 세뇌’ 와르르”
브루스 커밍스보다 좋은 승용차 제공
“우리 민족은 우수하니까 달리 대우”
서울 호텔 ‘외국 손님 우대’와 대조적
김일성대 방문해 교수들 만나 토론도
“도서관 마르크스 ‘자본론’ 없어 의아”
‘주체사상’ 저술은 빈약 ‘어록’만 다양
미국서 83년 일행과 ‘북한 방문기’ 펴내
86년 9명 공저 한국어판 ‘북한기행’으로
중국 지인 통해 황장엽에 편지 ‘무답’
1987년 주체과학원 건립에 더 ‘궁금’
1990년 조선아태평화위에서 초청장
2015년까지 매해 2회꼴로 ‘방북 토론’
나는 자가진단한 나의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남북한 평화와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행태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의 사회과학이론으로는 북한의 현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간주하면서 온갖 편견을 끝없이 양산하는 여론의 풍토(climate of opinion)에서 북한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북한에 가서 그곳의 현실을 직접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북한을 방문해서 기행문이나 여행기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북한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학술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은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감했다. 그런데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북한은 1981년 문호를 개방해서 국외 학자들을 초빙하는 사업을 벌였다. 북한의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 위원장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포 학자 6명이 그해 7월 방북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도 그곳에 낄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우리 일행은 고병철(일리노이대)·길영환(아이오와주립대)·김종익(웨스트미시간대)·양성철(켄터키대)·이채진(캘리포니아주립대) 그리고 나(조지아대)였다.
1981년 박한식 교수 일행의 방북을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 허정숙(맨오른쪽) 부위원장이 1985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때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이영덕(가운데) 남쪽 수석대표, 여연구(맨왼쪽)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등과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오랫동안 갈망했던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하! 여기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구나! 우리처럼 자녀의 학교 성적이 좋으면 마을 사람들을 초빙해서 한턱내고, 결혼식 때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밤이 되면 대동강변에서 젊은 남녀 쌍쌍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살면서 수십년 동안 북한은 악마들이 사는 곳으로 배웠다. 머리에 뿔이 달린 그 악마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주입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일상 현실을 목격하는 순간 나를 세뇌시킨 허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1981년 여름 방문한 북한의 첫 인상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사진은 81년 주체탑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에서 일상을 즐기고 있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일본 사진작가 구보다 히로지가 찍은 것이다.
해외동포원호회는 우리 일행을 대단히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예컨대 우리 일행에게는 개인별로 벤츠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와 다른 경로로 북한을 방문한 브루스 커밍스에게는 볼보 승용차가 지급되었다. 나는 허정숙에게 그 까닭을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민족은 특별히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대우를 달리해야 합니다!”
허정숙의 답변은 내가 한국에서 접한 답변과 극히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나는 서울로 건너와 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호텔 안내원은 나에게 시내 경치가 보이지 않는 방을 안내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내원은 이렇게 답변했다. “시내 경치가 보이는 방은 외국 손님들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냥 이 방을 쓰시지요.”
북한은 1981년 해외동포원호회를 통해 재미 동포 한인 학자들만이 아니라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초청했다. 사진은 80년대 여러차례 북한을 방문한 커밍스(맨왼쪽) 교수가 평양시 중구역의 인민문화궁전이 건너다 보이는 대동강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의 보통강 호텔에서 체험했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호텔 식당에서는 24시간 전에 요리 주문을 받았다. 무슨 메뉴가 있느냐고 물으니 뭐든지 주문하라고 그랬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어려운 메뉴를 주문하고 싶었다. “혹시 회가 있습니까?” 그러자 곧장 답변했다. “물론 있습니다!”
이튿날 내 식탁에는 대동강에서 잡은 커다란 잉어가 통째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잉어는 입을 뻐끔뻐끔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놀려주려는 속셈일까? 그러나 다시 보니 회를 정교하게 뜬 다음 잉어 껍질을 살짝 덮어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어떤 식당에서도 그런 식으로 회를 뜬 사례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싱싱한 회를 먹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박한식 교수 일행은 평양시 평천구역의 1급 호텔인 보통강여관에서 묵었다. 사진은 <조선향토대백과>에 실린 1983년 보통강여관의 무도장 모습.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그때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통일원 장관 홍성철의 주선으로 이북5도 도민회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약 3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나는 강연 끝에 이렇게 제안했다. “북한의 나쁜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좋은 부분도 보시면서 칭찬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자 청중 중 한 사람이 곧장 손을 들고서 질문을 했다. “북한의 좋은 점이 있다고요? 그런 것이 있다면 단 하나라도 꼽아보세요!” 나는 곧장 이렇게 답변했다. “왜 없겠습니까? 대동강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 먹을 수 있습니다. 저렇게 오염된 한강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까?”
북한은 나에게 ‘구호의 나라’라는 첫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북한의 거리를 거닐면 ‘세상에 부럼 없어라’, ‘지상낙원’, ‘일심단결’, ‘일당백’ 등등의 구호를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방문을 마치고 찾은 서울에서도 곳곳에 수많은 구호가 걸려 있는 모습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은 지금도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
북한을 방문했던 우리 일행은 미국에 돌아와서 <북한 방문기>(Journey to North Korea: Personal Perceptions, 1983)를 펴냈다. 이 책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북한기행>(한울, 1986)으로 펴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 일행의 북한 방문 경험을 살려서 각자 논문을 한편씩 작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행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관심이 있었던 주체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해서 수록했다.
박한식 교수는 1983년 방북 일행 6명과 함께 미국 펴낸 <저니 투 노스코리아>(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 ‘주체사상’ 논문을 썼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86년 박한식·양성철 교수 편저로 나온 한국어판 <북한기행>(한울)의 표지.
사실 나는 1981년 북한 방문을 학술여행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우리를 초청한 해외동포원호회의 ‘안배’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다. 북한에서 ‘안배’란 초청기관에서 작성한 방문 일정을 말한다. 따라서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었던 학자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안배’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던 것이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그곳의 교수들과 학술적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나는 특히 김일성대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한 1981년은 1948년 건국 이후 30여년이 지난 때이다. 그런데도 김일성대에서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발견할 수 없다면 북한의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서 ‘길을 찾아서’ 22회에서 북한 사회주의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 따른 분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로 포착할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자본론>을 읽지 않는다면, 북한 특유의 역사적 맥락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교는 북한 정부 수립보다 2년 앞선 1946년 설립된 최초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사진은 김일성대 누리집에 나와 있는 본관이자 전자도서관의 최근 전경.
또한 1981년 현재 김일성대 도서관에 주체사상 관련 책들이 많이 소장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나에겐 많은 것을 암시해 주었다. 물론 도서관에 주체사상의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로작’(김일성 어록)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활용해서 주체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서적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체사상 연구서가 많지 않다는 것이 곧 주체의 현실이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북한은 주체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규율하는 이념이 주체사상이었다. 예컨대 북한 정치는 자주를 요체로 삼는 ‘주체정치’로 운영되고, 북한 경제는 자립을 요체로 삼는 ‘주체경제’로 운영되었다. 옥류관이나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체건축도 있다. 주체건축은 기와지붕에 서양식 내부 시설을 갖춘 특징을 보인다. 외국악기와 전통악기의 조화로 연주되는 주체음악, 몇 가지 유형으로 한정된 주체헤어스타일, 하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상체를 주로 움직이는 주체춤 등도 있다. 주체사상에서 하체를 많이 움직이는 춤은 상스럽게 보인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1981년 현재 주체사상의 연구 수준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주체사상은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 등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정치적 이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분배의 정의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고, 종교적 신념의 요건을 갖추려면 내세관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사상에서는 그런 요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연구와 주체적 현실 간의 커다란 간극을 목격하면서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주체사상 연구가 북한에서 꾸준히 진행되리라고 전망했다.
미국에 돌아온 나 역시 주체사상을 계속 연구하고 싶었다.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을 개념적으로 포착해야만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아는 주체사상의 대표적 연구자는 황장엽(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래서 황장엽에게 연락을 취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황장엽에게 직접 연락을 할 방법은 없었다. 난감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머릿속에서 중국이 떠올랐다. 만주에서 태어난 덕분에 중국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지금도 만주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다. 아하! 중국에 있는 친구들을 통하면 북한에 편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은 북한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에 서신 왕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편지를 써서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쳤다. 그러면 그 친구는 내 편지를 새 봉투에 담아서 다시 황장엽에게 부쳤다. 어렵게 편지를 부친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그래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그처럼 메아리 없는 편지를 쓰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박한식 교수는 1970~80년대 김일성(왼쪽) 주석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황장엽(오른쪽) 주체사상연구소장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 끝에 1990년부터 조선아태평화위 초청을 받아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은 내게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에 주체과학원이 건립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과학원 건립 소식을 듣고서 마침내 주체사상의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북핵 위기가 조성되는 분위기를 관찰하면서 나의 관심은 주체사상 연구로부터 한반도 전쟁 방지 쪽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내가 그토록 처절하게 체험한 한국전쟁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북한을 더욱 방문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1987년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건립된 주체사상연구소 산하 주체과학원의 전경. 건립자인 황장엽이 97년 망명한 이후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평화문제연구소 제공
1990년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에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아태평화위는 북한에서 한국, 미국, 일본 등과 같이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설립한 비정부기구(NGO)이다. 그때부터 나는 북한을 적극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2회꼴로 북한을 방문했다. 나는 아태의 고위 관계자들과 꾸준히 만나면서 주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트랙(TRACK) Ⅱ’의 탄생이었다. 나는 북한, 미국 그리고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내가 재직 중인 조지아대학에 초빙해서 한반도 평화 방안을 논의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협의체를 결성해서 운영했다. 또한 주체과학원을 방문해서 그곳의 주체사상 연구에 참여하거나 관찰하면서 나의 주체사상 연구를 심화시켰다. 북한을 방문해서 활동한 내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박 교수는 81년 방북 때 평양 시내 곳곳에서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선전 구호와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오른쪽 맨 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