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은 1959년 아버지를 비롯한 온가족의 환호 속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사진은 낙산을 배경으로 미라보 다리 건너 정문과 마로니에 나무 정원이 상징이었던 서울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의 1960년대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대 입학하자마자 정신적 방황에 빠진 박한식은 철학과 박종홍(1903~76·사진) 교수의 변증법 강의를 즐겨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온 집안 식구가 대구 남산동 비좁은 방에서 숨을 죽이고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400단위의 숫자를 듬성듬성 읽어 내려갔다. 숨이 멎을 듯했다. 순간 갑자기 식구들 모두가 ‘우와 ~!’ 하고 함성을 질렀다. 평소 말이 없으시고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으셨던 아버님께서도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가서 막걸리 한잔 받아 오너라~.” 어머님께서 서둘러 밖으로 나가셨다. 나의 수험번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서울대 합격자 수험번호를 라디오로 방송해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 아버님께서 보여주신 기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나의 대학시절은 한마디로 정신적 방황의 시기였다. 나는 가슴 벅찬 기대감을 안고서 개강 첫날 정치학과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강의가 각종 정치제도를 암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 사유를 하고 싶었다. 특정 정치제도를 탄생시킨 매우 복잡한 사유의 과정이 나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정치제도라는 결과물을 단순히 암기할 것을 요구하는 강의에서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는 없었다.
미국의 ‘변증법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년)는 나치의 만행에 맞서다 교수형까지 당한 독일의 행동주의 신학자 본 회퍼의 스승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박한식은 그의 책을 읽고 종교철학에 심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이내 정치학과 강의실을 뒤로하고 더 넓은 세상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학문의 궁극적 본질이란 무엇일까? 나의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 발길을 철학과 강의실로 향하게 했다. 그 와중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의를 발견했다. 박종홍 교수의 철학 강의였다. 특히 박 교수의 변증법 강의에서 매력을 느꼈다. 변증법에서는 ‘정’(正)과 ‘반’(反)의 관계를 상호 배타적 관계 대신 상호 의존적 관계로 파악했다. 그래서 정의 본질이 반이고, 반의 본질 또한 정이라는 역설을 강조했다.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음이 양을 머금고 있고, 양도 음을 머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논리와 유사했다. 변증법의 역설에 따른다면 자본주의에서 중시하는 자유의 본질은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평등에 있고, 평등의 본질 또한 자유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했다. 그렇다면 남한의 본질은 북한에 있고, 북한의 본질은 남한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변증법의 역설에 진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훗날 미국에 유학해서도 변증법을 계속 공부했다. 사실 박 교수 강의에서는 정에서 반으로 이행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서양의 수많은 변증법 논리를 공부하다가 마침내 그 동력을 발견했는데, ‘내적 모순’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정이 그 자체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반으로 이행하게 된다는 논리에 주목했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분배의 정의가 와해되는 내적 모순을 겪게 되는데, 그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논리가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학창시절에 공부한 변증법은 훗날 내가 인생 후반에 정립한 ‘변증법적 통일론’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나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머금고 있는 역설적 존재이며, 따라서 각자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통일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종교철학에 심취한 박한식은 서울대 문리대 근처에 있던 통일교 교회에도 다닌 적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흥인동의 통일교 교회에서 문선명(왼쪽) 창시자가 제1회 원리 시험을 감독하고 있다. 사진 선학역사편찬원 제공
내가 철학과 강의실에서 매력을 느낀 또 하나의 주제는 종교철학이었다. 특히 변증법 신학자로 평가되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 등을 탐독하면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아예 전공을 비교종교철학으로 바꾸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기도 했다.
종교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 무렵 서울대 주변에 있던 통일교 교회를 발견하고서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통일교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나는 새벽마다 통일교 교회에 나가 문선명의 설교를 직접 들었다.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던 때였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독특하게 결합시켜 성립한 통일교 ‘원리’의 골격이었다. 통일교의 가족주의적 성격은 가족이 파괴된 서구사회에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나는 훗날 주체사상을 연구하면서 가족주의와 민족주의가 주체사상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내가 볼 때 통일교 원리와 주체사상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이 있었다.
박한식은 대학시절 ‘양심적 병역 거부’ 등 반전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메노나이트 교단의 선교사와도 교유했다. 한국전쟁 터진 뒤인 1951년 국내에 진출한 메노나이트 교단은 경북 경산에 선교본부를 두고
또 한편으로 나는 미국에서 온 메노나이트 선교사와 가깝게 지냈다. 메노나이트는 일상의 삶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반전 평화주의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 그 시절 징병제를 유지했던 미국은 메노나이트 신도가 군 복무 기간에 국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병역의무를 면제해주었다. 내가 메노나이트와 접하면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정치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서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양식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이 무려 100년 이상 종교전쟁의 나락으로 전락했던 궁극적 까닭은 정치와 종교를 긴밀하게 결합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리적 강제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서 종교적 신념을 타자에게 강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유럽 전역을 피바다로 만든 종교전쟁이 폭발했던 것이다. 유럽은 100여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오직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야만 평화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많은 정치인이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정치를 하고, 또 적지 않은 교역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을 신도들 앞에서 종교적으로 옹호하기도 한다. 한국 정치가 17세기 유럽 종교전쟁의 시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그러한 퇴행성은 한반도를 ‘약속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교전쟁 때처럼 ‘폭력의 땅’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선악관을 견지했던 해리 트루먼, 서북청년단 등이 한국전쟁 전후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양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대학시절을 풍요롭게 만든 가장 따뜻한 추억은 전성원과 함께 4년 내내 경동교회를 다닌 것이다. 강원용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대화가 없으면 평화와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강 목사의 뜻을 이어 내 나름의 대화이론을 정립했다. 나는 대화의 요체를 ‘가치관의 교환’으로 파악한다. 가치관의 교환이 꾸준히 축적되면 상호 이해의 지평이 열린다. 상호 이해의 지평이 열리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새롭게 형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북한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한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답변은 나의 대화이론에 따라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은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주류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국의 주류 사회과학이 현실의 문제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런 병폐를 철학적으로 진단한 다음,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과학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2017년 출간한 500여쪽 분량의 저서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는 그 노력을 집대성한 셈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를 당대 현실의 지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학문적 논리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나의 북한 연구, 그리고 내가 언론에 나와서 하는 얘기는 모두 나의 독자적 사회과학이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나의 대학시절에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은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서영훈 선생 댁을 방문했는데 함 선생이 그곳에 와 계셨다. 내 기억으로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사상계> 편집회의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함 선생은 명동에 있는 흥사단의 대성빌딩에서 매주 강연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강연에 참가하면서 함 선생의 사상에 점차 빠져들었다. 또한 함 선생 댁도 방문하고, 천안에서 운영하시는 씨알농장에도 가봤다. 손주를 등에 업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인간적인 보통사람의 체취를 느꼈다.
나는 씨알농장에서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계시는 함 선생을 따라가면서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늘 저희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답변해 주셨다. “나는 지금 이 밭일을 하다가 팍 고꾸라져 죽으면 가장 멋있게 죽는 거다!” 함 선생의 답변은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게 했다.
내가 함 선생을 뵈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기독교의 믿는 폭을 무한히 확대한 ‘종교적 개방성’이었다. 함 선생은 자신의 종교적 회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그 기독교는 성서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모든 종교의 알짬(진리)은 한 가지. … 이제 시대가 달라서 기독교도 믿는 폭이 넓어져야겠다. … 제 것만 주장하며 남을 부정하는 것도 폭이 좁은 사상. …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모자란 생각이다. 불교, 힌두교, 유교 다 높은 믿음이다. 다만 이 시대를 바로 보고 일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함 선생의 종교적 개방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은 산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등산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산봉우리는 종교적 진리를 상징하고, 다양한 등산로는 기독교, 불교, 유교 등과 같은 다양한 종교를 상징한다. 우리는 다양한 등산로를 이용해서 산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산봉우리에서 모두가 함께 만난다. 산봉우리에서 둘러보는 경치는 하나뿐이다. 함 선생은 우리 또한 다양한 등산로와 같은 다양한 종교를 수단으로 산봉우리와 같은 종교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봤다. 요컨대 종교적 수단은 다르지만 그 수단을 통해 도달하는 종교적 진리는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함 선생의 종교적 개방성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사례 중 하나는 1950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출간했지만 수년 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한 것이었다. 함 선생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천국이 만일 있다면 다 같이 가는 데가 아니겠나! …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으냐. …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그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함 선생은 한국 역사의 ‘뜻’을 ‘고난의 역사’로 파악했다. 즉 고난 그 자체에서 뜻을 찾았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가 제 까닭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 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고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함 선생의 고난의 역설을 수용하면서도 그 고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고난 그 자체에서 뜻을 찾는 대신 고난을 극복하는 데서 뜻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한국 역사를 성찰할 때 한민족은 나에게 ‘오뚝이 민족’으로 다가왔다. 한민족은 단 한 차례도 그 어떤 타율적인 힘에 영원히 굴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 오천년의 역사가 바로 그런 진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