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분석: 한-중관계 ‘태풍의 눈’ 사드 -
왕이 “한국 실질적 행동을” 경고
북-중 회담 취재는 이례적 허용
전날 윤병세 장관 냉대와 대조
‘사드 포기냐’, ‘한-중 관계 악화냐’
사실상 한국에 양자택일 압박
갈수록 태산이다. 중국 정부가 라오스에서 진행되는 아세안지역포럼(ARF)을 비롯한 연쇄 외교장관회의 계기에 한국·미국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주한미군 배치 결정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이 조기에 수습되지 않는다면, 한국-중국 관계를 집어삼킬 ‘태풍의 눈’으로 악화할지도 모를 위태로운 순간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5일 낮 12시께부터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북-중 양자 외교장관 회담을 한 시간 남짓 벌였다. 그런데 회담에 앞서 중국 외교부 공보담당이 한국 취재진의 회담장 취재를 제안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북·중 양국은 지금껏 양국 회담 장면을 한국 취재진에 공개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2명의 한국 취재진이 왕이 부장과 리용호 외무상의 회담 머리발언 장면을 직접 취재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기획은, 사드 배치와 관련한 중국 정부의 불만을 ‘북한 껴안기’라는 외교적 보여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강조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주북한 중국대사의 리 외무상 출국 배웅(23일)→리 외무상과 왕이 부장의 라오스행 여객기 동승(24일)→북·중 대표단 숙소 같은 곳 잡기(24일)→북·중 외교장관 회담 한국 취재진에 공개(25일)’로 이어지는 중국 정부의 일련의 조처는, 한국을 표적으로 한 정교하게 기획된 외교 행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왕이 부장은 회담장 앞까지 나와 리 외무상의 등에 손을 얹는 등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만 왕이 부장은 리 외무상한테 “중국 쪽은 (한)반도의 비핵화, 평화·안정 유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견지한다. 이 기본 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 3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는 전날 늦은 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보인 냉랭한 태도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왕이 부장과 양자회담을 24일 마지막 일정으로 잡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한 설득 외교”(외교부 당국자)를 펼치려 했다. 하지만 왕이 부장은 한국 취재진 앞에서 ‘폭탄 발언’을 쏟아낸데다, 회담 시간도 한국 쪽이 기대한 ‘1시간30분 이상’보다 짧은 1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왕이 부장은 윤 장관과의 회담에서 “최근 한국 쪽의 행위는 쌍방의 호상(상호) 신뢰에 해를 끼쳤다. 유감스럽다”며 “한국 쪽이 우리 관계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지 들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왕이 부장의 이런 발언은 ‘사드 주한미군 배치’ 발표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히는 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시정’, 즉 사드 배치 추진 중단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예상된다. 이는 한·미 양국의 ‘사드 주한미군 배치 결정’ 발표 당일(8일) “강렬한 불만”(외교부 대변인)을 표현한 데 이어 “(중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상응하는 조처를 취할 수 있다”(11일 외교부 대변인), “중국은 자신의 평화와 안정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견결히 취할 것”(13일 외교부 대변인)이라며 대응 행동 예고의 수위를 높여온 중국 정부 태도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 쪽이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지 들어보려 한다”는 왕이 부장의 이번 발언은, 중국 쪽이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에 앞서 한국 쪽에 보내는 ‘마지막 경고’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사드 포기’와 ‘한-중 관계 훼손·악화’ 가운데 한국이 양자택일하라는 외교적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왕이 부장이 윤 장관한테 “쌍방의 인적 교류는 이미 1천만명 시대에 올랐다”며 “이런 협력은 두 나라 인민한테 복리를 가져다주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복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강조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드 주한미군 배치’ 논란이 한-중 양국 협력을 해쳐선 안 된다는 원론적 언급일 수 있지만, 듣기에 따라선 ‘한국이 사드 배치를 강행하면 한해 1천만명을 넘어선 양국의 인적 교류를 비롯해 경제협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엄포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해서다. 한-중 간 인적 교류는 지난해 1042만명인데, 이 가운데 598만명(57%)이 방한 중국인이다. 2015년 한-중 무역규모는 2274억달러로, 이는 한국의 미국·일본·유럽연합(EU) 무역액을 모두 더한 것보다 많다. 중국은 한국의 압도적 1위 무역 상대일뿐더러 한국이 지난해에만 469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중국 관광객의 한국 방문 통제 등 유·무형의 각종 경제 압박을 가하면 한국 경제에 간단치 않은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중국 정부의 이런 강력한 불만 표출과 공세적 압박에도 ‘사드 주한미군 배치’ 문제를 둘러싼 한·중 양국의 이견을 해소할 접점을 찾기가 적어도 현재로선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윤 장관은 왕이 부장의 외교적 수사를 걷어낸 날선 압박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며 “사드 배치 결정은 자위적 방어적 조처로서 책임있는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맞섰다. 절충에 필요한 ‘양보’를 시사하기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을 통해 거듭 강조해온 정부의 공식 견해를 녹음기 돌리듯 반복한 셈이다.
중국 쪽의 눈에 두드러진 ‘한국 압박’과 ‘북한 껴안기’는,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한 미국·일본의 중국 압박, ‘사드 주한미군 배치 결정’이라는 한·미 양국의 공세적 행보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한·미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한 대북제재 국제공조 전선에 균열이 불가피함을 뜻하는 것이자 동북아 역내 구도가 한층 복잡해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저성장 기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경제를 덮칠 짙은 먹구름이기도 하다.
비엔티안(라오스)/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25일 오후(현지시각)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북-중 양자회담 시작 전 중국 왕이 외교부장(왼쪽)이 북한 리용호 외무상을 맞이하러 문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있다. 비엔티안/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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