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는 가운데 제25회 윤이상음악제를 위해 평양을 찾은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들이 평양 모습을 보내왔다. 다소 흐린 날씨 탓인지 평양의 한산한 거리 풍경이 어둡다.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본사기자 방북 취재기
북한 핵실험 여파로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제25차 윤이상음악회’(18~20일) 취재를 위해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한겨레> 이용인 기자가 평양 거리와 시민들 모습을 전해왔다. “핵실험은 남쪽을 겨냥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북쪽 동포들의 생각과 분위기, 그들이 남녘 동포들한테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평양은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일상은 그러했다. 그러나 자신감과 긴장이 미묘하게 중첩된, 보이지 않는 분위기도 약하지만 감지할 수 있었다.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제25차 윤이상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17일, 계절은 벌써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샛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잎,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나무들, 논 곳곳에 쌓인 노적가리 따위는 대체로 남쪽의 11월 초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등짐을 지고 총총걸음을 재촉하는 아낙네, 저수지에서 시간을 낚는 노인들, 잔디밭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뒹구는 아이들도 그동안 북쪽을 방문할 때마다 보았던 평양 외곽의 낯익은 풍경이다.
평양 시내의 모습은 되레 활기차 보였다. 고려호텔 건너편에서는 식료품 매대를 새로 만드느라 용접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찌 보면 거리를 오가는 차량도 지난봄보다 늘어난 것 같았고, 여성들의 옷 색깔도 분홍·빨강·파랑 등 원색에 가까워져 더 화사해 보였다. 음식점이 몰려 있는 중구역 창광거리의 ‘승리식당’ ‘약산식당’ ‘창광식당’ 따위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핵실험’ 이전과 이후 모습이 확연하게 차이가 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거리 오가는 차량 봄보다 늘어
평양 중심가는 차라리 ‘축제’ 분위기였다. 이날 ‘ㅌ·ㄷ 80돐’ 기념일을 맞아 호텔 로비, 식당, 건물마다 ‘경축 ㅌ·ㄷ 80돐’이라는 현수막과 간판들이 내걸렸고, 다음날인 18일까지 가로수와 가로등에는 인공기와 오색깃발이 꽂혀 있었다. “ㅌ·ㄷ 선군 영도”, “ㅌ·ㄷ 우리당의 빛나는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하자” “ㅌ·ㄷ 주체혁명 위업 빛나게 계승” 등처럼 기존의 구호 앞에 ‘ㅌ·ㄷ’을 붙여 기념일을 강조하기도 했다. ‘ㅌ·ㄷ’이란 ‘타도 제국주의 동맹’의 약자로, 1926년 김일성 주석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화성의숙 학교 친구들을 규합해 만든 첫 정치조직이라고 북쪽에서는 얘기하고 있다.
이번이 꺾어지는 해인 ‘ㅌ·ㄷ’ 정주년이기 때문에 북쪽에서는 17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북쪽 관계자는 “노동당 창건 61돌 기념일(10월10일) 행사는 작게 하는 대신 ‘ㅌ·ㄷ 80돐’ 행사는 크게 치르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 이날 밤 10시쯤 고려호텔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는, 주체사상탑 광장에서 시작해 동문네거리를 거쳐 당창건 기념탑에 이르기까지 행진하는 청년학생들의 ‘횃불 행진’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했다. <중앙텔레비전>에서는 다음날까지 ‘횃불 행진’을 반복해 보여줬다. 연도에는 “각 계층 시민들의 경축열기로 끓어 번졌고”, 이어진 청년학생들의 연회에서는 “경축의 축포가 터져오르는 가운데” 청년학생들의 “환희의 춤바다”가 벌어졌다고 다음날 <로동신문>은 전했다.
핵실험에 대해 북쪽 사람들한테는 은근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ㅌ·ㄷ 80돐’의 ‘축제’ 분위기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극히 제한돼 있기는 하지만, 북쪽의 일반 주민들은 핵실험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자랑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북쪽의 핵실험이 일본 핵무장의 빌미가 되고, 그렇게 되면 동북아시아가 전체적으로 핵 도미노와 안보 불안에 빠질 것이라는 남쪽의 우려를 전하자,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남쪽의 윤이상평화재단 참관단을 안내하는 북쪽 관계자도 “조선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남쪽에서는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됐고, 우리는 또 여자축구와 아시아마라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는 “의미있는 문화행사라서…”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핵실험도 위대한 민족의 목록 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관계자는 “우리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주적 국방을 갖추고 핵강국이 됐다는 자긍심을 인민들이 갖게 됐다”고 좀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런 정세 오래가겠나” 기대도
그러나 1920년대 시작된 과거 ‘타도 제국주의’라는 외침이, 북쪽이 현재 직면한 ‘미국’이라는 현실과 겹쳐지는 것도 외부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북-미간 대결은 당연히 북쪽 내부 사회의 긴장을 유발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북쪽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는 ‘긴장된 정세’라는 말을 싫어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런 정세가 오래가겠느냐”며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고려호텔 손님도 최근 들어 다소 줄었다고 한다.
북쪽은 답답한 정세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부에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윤이상평화재단 방북단이 평양에 들어온 날과 같은 날인 17일, 미국의 <에이비시>(ABC) 방송이 북쪽의 초청으로 평양을 찾았다. 북쪽의 초청은 미국의 목소리, 국제사회의 일방적인 목소리에 묻혀 자신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 때문인 듯했다.
미사일 시험발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핵실험에 대해서도 북쪽은 남쪽 사람들의 반응을 무척 궁금해하는 듯했다. “남쪽 사람들에게는 핵무기 자체가 주는 공포감도 있다”고 전하자, 음악회 행사에 참석한 북쪽 고위 관계자는 “절대로 남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데”라며 왜 이해를 하지 못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부시 때문에…”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윤이상평화재단 방북단에 “어려울 때 찾아줘 고마워”
일부 남북 민간교류마저 중단되는 상황에 대해 북쪽이 몹시 서운해하는 것도 ‘핵실험은 남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거꾸로 북쪽 사람들은 어려울 때 평양을 찾아준 남쪽의 윤이상평화재단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북쪽 사람들은 이를 ‘신뢰’의 징표로 여기는 듯했다.
북쪽 고위관계자는 “핵실험 이후 평양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대로다”라며 “남쪽에서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생각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남과 북이 핵실험에 대해 느끼는 온도차가 평양의 일교차만큼이나 크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평양/이용인 기자 yyi@hani.co.kr
북한이 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의 첫 조직으로 기념하고 있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 결성 80주년(10월17일)을 맞아 고려호텔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다. 평양/윤이상평화재단 제공
제25회 평양 윤이상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17일 평양을 방문한 박재규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등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들이 18일 북한의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인 평양 창광유치원의 교실을 둘러보고 있다. 평양/윤이상평화재단 제공
이용인 기자
북한의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인 평양 창광유치원.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북한의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인 평양 창광유치원.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북한의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인 평양 창광유치원.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북한의 대표적인 유아교육기관인 평양 창광유치원.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 관련 사진.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 관련 사진.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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