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정부에 대한 모욕”, “사법 질서에 대한 부정”.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공개한 발언은 날이 서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전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을 향해 좁혀 오는 검찰 수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했을 때만 해도 청와대는 말을 아꼈다. 논평을 내지 않았고, 기자들의 질문에 참모들은 “할 말이 없다”며 입을 닫았다. ‘전-현직 대통령의 대립’으로 쟁점화되는 걸 우려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하루를 묵힌 뒤 문 대통령이 직접 이 전 대통령을 직격했다. 참모들 가운데 “정치쟁점화하려는 이 전 대통령의 의도에 말려들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되레 “왜 참고 있느냐”고 참모들을 질책하며, 대변인에게 자신의 발언을 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차가운 분노”라고 표현했다.
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직면한 전직 대통령의 항변을 직접 비판하고 나선 건 매우 이례적이다. 청와대 다른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했다. 일단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간 책임이 적지 않은 당사자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자신과 측근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할 명분으로 활용한 게 문 대통령의 감정선을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의 동지’였던 문 대통령에게 노 전 대통령 서거는 ‘묻어두고’ 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본질적 상처’다. 정치와 거리를 두던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스스로 표현한 대로 “운명”처럼 현실 정치로 불려나왔다. 대통령 취임 뒤 노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그는 “참여정부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로 확장해야 한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노무현의 동지’에서 ‘대통령’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이 정치보복을 주장하며 노 전 대통령의 죽음 때문이라고 나서니,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적반하장’으로 여겼을 법하다.
이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정권의 기획’으로 몰아가는 것도 문 대통령을 분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동원한 정치를 경계했고, 현재도 그 원칙을 유지하면서 검·경, 국정원 개혁에 힘을 쏟고 있는데 마치 검찰이 청와대의 지시로 이 전 대통령 주변을 수사하고 있는 듯이 표현한 대목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문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이 마치 청와대가 정치보복을 위해 검찰을 움직인 것처럼 표현했는데 우리 정부에 대한 모욕”이라며 이 대통령의 발언을 사법 질서에 대한 부정, 정치 금도를 벗어나는 일로 규정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경우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문 대통령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가며 결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늘 묻는 두 가지는 ‘옳으냐’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분노 표출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논쟁 구도로 굳어질 수 있다. 개헌과 권력기관 개혁 등 연초에 꺼내든 굵직한 의제들이 정쟁에 갇혀 야당의 협조를 끌어내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당장 자유한국당 쪽은 문 대통령의 강도 높은 반응을 반기는 모양새다.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 아니냐”고 했다. 장제원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청와대가 정치보복을 위해 검찰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디제이·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공평하게 수사해야 할 것”이라고 역공을 취했다.
김보협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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