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로 향하는 책임의 화살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빨간펜 수정’이었다. 304명이 희생된 대참사가 발생했는데도 “재난의 컨트롤타워는 청와대가 아니다”라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면피 발언’으로 여론이 들끓자, 2014년 7월31일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서 안보실장의 역할을 대폭 수정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12일 청와대가 공개한 ‘박근혜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캐비닛 문건’을 보면,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대통령 훈령 318호)의 ‘제18조 징후 감시체계 운용’ 항목에서 “국가안보실장은 안보·재난 분야별로 위기징후 목록 및 상황정보를 종합·관리한다”는 대목이 붉은 두 줄로 삭제 표시가 돼 있다. 대신 “국가안보실장은 안보 분야, 안전행정부 장관은 재난 분야의 위기징후 목록 및 상황 정보를 관리한다”며 손글씨로 고쳤다. 안보실장의 책무를 명기한 3조에서도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의 위기관리를 보좌하고 국가차원 관련 정보 분석, 평가, 종합, 위기관리 수행체계 구축 등 안정적인 위기관리를 위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는 표현이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의 안정적 국정수행을 보좌한다”로 짧게 고쳐져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논란이 될 법한 대통령훈령(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 개정을 하면서도 모든 절차를 생략하는 불법 행위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본래 대통령 훈령인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을 개정하려면 법제처장의 심사 요청과 대통령·법제처장 재가를 밟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박근혜 청와대는 이를 모두 무시했다.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위기관리지침 개정 내용은 이후 모든 부처로 ‘통보’됐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법제처를 통해 확인했지만 사후 인가조차 받은 바 없는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김관진 전 실장이 이런 불법 행위를 저지른 데는 책임 회피를 위한 짜맞추기 성격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이후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7월10일 국회 세월호국정조사특위 기관보고에서 “법상으로 보면 재난 종류에 따라 지휘·통제하는 곳이 다르다. 청와대가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청와대는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있으므로 대한민국 모든 일에 대해 청와대가 지휘하지 않느냐는 뜻에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법상으로 보면 다르다”며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의하면 재난의 최종 지휘본부는 안전행정부 장관이 본부장이 되는 중앙재난대책본부장”이라고도 말했다. 김관진 전 실장은 아예 김기춘 전 실장의 주장에 걸맞게 국가위기관리지침을 자의적으로 개정해 뒤탈이 없도록 조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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