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치고 27일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귀국 당일 이완구 국무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도 ‘성완종 리스트’ 파문 등에 대한 별다른 대국민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열흘 넘게 ‘대통령 부재’라는 어수선한 정국이 이어지면서 여론의 관심이 박 대통령의 귀국 메시지에 쏠린 상황이지만, 정국 현안에 대한 박 대통령 메시지는 29일 재보궐선거 이후에나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에는 ‘박 대통령의 건강 악화’라는 변수도 한몫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귀국 뒤 브리핑을 통해 “박 대통령이 순방 기간 내내 심한 복통과 함께 미열이 감지되는 등 몸이 편찮은 상태에서 순방 성과를 위해 애쓰셨다”며 “귀국 직후 검진 결과, 과로에 의한 위경련과 이에 따른 복통이 주 증상이었고 인두염에 의한 지속적인 미열도 있어, 의료진은 하루나 이틀 정도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권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28일 국무회의 주재 일정을 취소했고, 국무회의는 총리직을 대행하게 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기로 했다.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도 29일 이후로 자연스럽게 미뤄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이 이완구 총리의 사표를 앞당겨 수리한 것도 재보선 전에는 직접 대국민 메시지를 밝히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국무회의 주재 취소와 관련해 “박 대통령의 안정이 우선”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재보선 일정도 의식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더라도 다음날 선거 결과와 맞물려 이런저런 해석과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선거 전 메시지를 내놓으면) 어떤 이들은 또 선거개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으냐”며 시기적 고려도 있었음을 내비쳤다. ‘건강 문제’가 이유인 만큼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여지가 생긴 측면도 있다. 청와대로선 결과적으로 재보선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는 상황을 피하면서, 재보선 결과를 보며 대국민 메시지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남은 시간 동안 ‘발언 수위’를 정해야 하는 박 대통령으로선 여야의 유감 표명 또는 사과 요구가 거세다는 점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26일에 이어 27일에도 “어떤 형태로든 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리”라며 사실상 사과를 촉구했고, 유승민 원내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 분노가 무섭다. 대통령께서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진솔한 말씀을 직접 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청와대를 압박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이날 오후 당 의원총회에서 “대통령 자신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공정하고 추상같은 수사 결과를 내놓을 때만이 박근혜 정권의 신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며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하며, 비서실장 등 공정수사 장애요인을 모두 제거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석진환 김경욱 기자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