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월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며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대립과 전쟁 위협, 핵 위협에서 벗어나서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가야만 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43
급변에 의한 통일은 환상…대박은 평화에 있어
북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신뢰를 갖도록 해야
급변에 의한 통일은 환상…대박은 평화에 있어
북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신뢰를 갖도록 해야
‘과세 평안하세요.’ 어른들께서 건네는 새해 인사였습니다. 다양한 표현으로 변주되곤 하지만, 여전히 새해 인사의 기본형입니다. 사실 이만큼 정갈하고 간명하고 정숙한 표현은 없어 보입니다. 두루 과세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옛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평안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했던가 봅니다. 평안이란 평화와 안녕을 합친 의미겠지요.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평화라고 한다면, 안녕이란 인재나 천재로 인한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를 뜻할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의 결과가 평화이고, 신의 가호까지 있어야 가능한 게 안녕인 게죠.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니 평안이란 진실로 큰 축복입니다. 대박이니 부자니 하는 것보다 얼마나 품위와 격조가 있습니까.
아이들 앞에서도 ‘대박’ 운운하셨다지만, 대통령께서도 실은 무엇보다 이 나라 이 국민의 평안을 기원했을 겁니다. 한번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대치 상태인 우리의 가장 큰 바람은 공동체의 평화이고, 개개인의 안녕입니다. 부자가 되건 대박을 터뜨리건 전쟁이나 천재지변 한 방이면 모두 잿더미가 됩니다.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국민의 안녕이야말로,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고 복인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대통령이 불쑥 통일 대박론을 제기했을 때 불만스러웠던 것은, 통일을 흥행으로 여기고, 통일의 결과로 평화가 아니라 떼돈이 생기는 걸 염두에 두고 있는 천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천박함은 통일을 정략적 구호로 삼는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이들의 태도도 얍삭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해 전까지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공들이던 것은 통일보다는 한반도 평화였습니다. 통일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다짜고짜 통일을 앞세우다가는 오히려 약한 상대방을 자극해 그나마 평화로의 이행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상생과 공영을 추구하는 평화의 결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평화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게 한반도 현실입니다. 따라서 평화의 가치를 앞세우는 건 매우 이성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물론 평화만 내세웠다가는, 분단 고착을 용인하는 것이냐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어도 전면에 내세우기 힘들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실적인 제약, 실질적인 효과를 감안할 때 남북의 화해와 협력, 4강 외교의 가장 큰 목표가 한반도 평화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통일 대박론’이 터지자 대개는 그것이 단기적으로 가져올 효과에 기대 그 위험성에는 침묵했습니다. 일단 이명박 정권과 수구 언론의 ‘통일 무용론’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난 평화통일 논의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건 듯했습니다. 그것이 이승만의 북진통일인지, 이승만이 처형한 죽산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인지 알 수도 없고, 또 북 체제의 급변에 의한 것인지, 평화로운 과정에 의한 것인지도 묻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들은 말했어야 합니다. 한반도에 진실로 요구되는 것은 통일에 앞서 평화라는 것,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평화라는 것을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통일은 그런 평화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도 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또 대박이 될 수 있는 통일은 평화통일이지, 홍시 떨어지듯 급변 사태로 떨어지는 통일이 아닙니다. 사실 급변 사태는 통일을 낳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분쟁만 낳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통일은 남북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변 열강의 입김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통일이란 불가능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의 해방처럼 말입니다. 국제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우리의 노력이 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은 분단을 낳았고, 분단은 민족사 최악의 동족상잔으로 이어졌습니다. 열강들은 수지타산에 따라 한반도를 분할하려 했지, 한국민을 손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또다른 연장이었습니다. 그처럼 남북의 주체적인 노력이 없이, 외세에 의해 감 떨어지듯 떨어진 박은 대박이 아니라 악몽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건 통일이건 논의와 추진의 주역은 남북 당사자여야 합니다. 단 통일은 약한 쪽에게 오해와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상대편에 흡수되는 걸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수한 평화 공존과 공영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로에게 보탬이 되는 걸 확신할 때, 즉 평화가 제도화될 때 통합 혹은 통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독일 통일의 과정을 밟기도 힘들겠지만, 단 서독은 30년에 걸쳐 변함없이 동독을 지원했을 뿐 붕괴를 노리며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저의 고모부와 그 추종자를 막무가내로 처형하는 그런 정나미 떨어지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 국가라도 우리가 평화적 접근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북 체제에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긍정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결실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1945년 해방처럼 말입니다. 졸지에 공포된 일본의 항복 선언 앞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통탄해 마지 않았던 까닭은 거기에 있습니다. 한반도 운명이 미국과 소련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걸 예감했던 것입니다. 지도자라면 그 정도의 안목은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박근혜호는 집권 2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앞선 정부들을 보면 대개 집권 1년차엔 내정 혁신을 다진 뒤 2년차엔 국가적 과제인 남북 문제의 돌파구를 찾는 데 노력했습니다. 물론 정권 초부터 압박, 급변, 붕괴를 추구하는 정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임기 후반에 서둘러 교류 화해 공존의 길을 모색했지만, 기차가 지난 뒤였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기왕에 2년차 초입에 통일론을 꺼냈으니, 현실적인 목표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급변이나 붕괴에 의한 통일은 환상입니다. 대박은 평화에 있습니다. 평화는 그 자체로도 축복이고, 번영의 기회가 되며, 평화의 도정 속에서 통합은 이루어집니다.
잘 알다시피 북 정권의 비정상적 행태는 불안에서 비롯됩니다. 야만적인 숙청도 결국 권력의 불안에서 비롯됐고, 오로지 핵무기 개발에 명운을 거는 것도 체제 불안에서 비롯됐습니다. 북이 지금도 열심히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진력하는 것도 바로 그 불안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쪽의 선택은 비교적 간명합니다. 내키지 않더라도,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고, 교류 협력을 통해 신뢰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평화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야 합니다. 대외적으로도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지와 역량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한반도를 열강이 바둑판의 사석으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부디 대한민국이 과세 평안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평화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박 속 내용물이 안녕과 번영이라면, 평화야말로 대박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곽병찬 대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