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올해 한해 정국의 최대 이슈는 뭐라 해도 선거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 문제다.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국회 선진화법 역시 논란에 휩싸였다. 선진화법 논란은 ‘식물국회’ ‘동물국회’로 조롱받는 국회를 어떻게 개혁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 제정 주역이었던 원혜영(5선·경기 부천오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국회 개혁, 정치 개혁 과제를 점검해봤다.
원 의원은 “국회를 언제까지 몸싸움 터로 만들 거냐는 처절한 각성이 모여 선진화법이 나온 것”이라며 “법질서의 수호자라는 정통 보수세력이 조직적으로 의결하고 원내대표 지휘 아래 총동원돼서 선진화법을 아예 무시하고 유린한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선진화법 개선과 관련해 “법 조항을 고치는 것보다 국회 의사일정을 자동화하는 방향으로 국회 운영의 근본원리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회 의사결정의 주체가 교섭단체가 아니라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개개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면 선진화법이 더욱 살아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국회의사일정 자동화법’(가칭)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교섭단체든 의원이든 관련 규정을 어길 경우 국고보조금이나 세비를 삭감하는 등의 페널티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선진화법은 이명박 정권 말기인 2012년 5월에 여야 합의로 제정됐다. 당시 제정의 주역인데.
”2008년 말 민주당 원내대표를 할 때 이른바 ‘엠비(MB)악법’ 158건을 일괄상정해서 두드리겠다 하길래 12일 동안 본회의장 점거농성을 해서 막았다. 그 직후인 2009년 초 필리버스터 도입 등 선진화법의 요체가 되는 걸 내가 처음 제안했다. 언제까지 국회를 몸싸움 터로 만들 거냐는, 진짜 부끄럽고 처절한 각성들이 있었다. 더 이상 동물국회는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뜻있는 여야 의원들과 2년에 걸쳐 논의한 끝에 최종안을 만들었는데,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동의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거 하나는 큰일 했다, 나는 그렇게 본다.”
―패스스트랙 지정 과정의 충돌을 보면서 선진화법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선진화법 규정을 정확히 알면서도 아예 무시하고 법을 어기는 걸 가지고 법이 잘못됐지 않냐고 할 수는 없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선진화법 제정 때의 처절한 자기반성이 벌써 흘러간 역사가 되고, 신참 정치인들이 ‘무슨 국회가 이래, 다수결로 하면 되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 식물국회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던 판에 그래도 선진화법으로 60%의 ‘가중다수’를 규합하면 중요한 법을 진행시킬 수 있다는 사례가 이번 패스트트랙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회의를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등 선진화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선진화법을 이렇게 어길 줄은 아무도 몰랐지않나. 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니까 옛날 자유당 때 테러가 생각났다. 당시 야당에서 테러라고 반발하니 자유당은 ‘백주대낮에 한 것인데 그게 무슨 테러냐, 밤중에 몰래 하는 게 테러지’ 하며 백주대낮에 한 거는 테러가 아니다는 식으로 나왔다. 아주 유명한 얘기다. 이번 역시 선진화법이란 건 있지도 않은 것처럼 집단적·조직적·물리적으로 저항했다.”
―선진화법엔 강력한 제재 조항이 있다.
“제정 당시 제재 규정을 만든다고 해서 지켜지는겠느냐는 의구심이 있었다. 몸싸움에 이골이 났는데 소수정당이 막 치고들어와 몸싸움을 재연하면 법만 무시되는 거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 말이 안되는 강력한 처벌 규정을 넣은 것이다. 폭력, 폭행하고 비교가 안 되게 5년, 7년의 처벌 규정을 넣었다. 그 주장을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주도했다.”
―당시 집권당이 한나라당이었으니 그랬을법 하다.
“그렇다. 왠만한 규정으로는 법 무시하고 싸우는 데 이골이 났으니 감히 쳐다도 못 보게,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게 무지막지하게 해야된다는 주장을 한나라당이 했다. 다들 공감해서 선진화법 만들고 7년간 몸싸움이란 용어가 없어졌다. 그게 이번에 정면으로 유린된 것이다. 법 질서의 수호자라는 정통 보수세력이 조직적으로 의결하고 원내대표의 지휘 하에 총동원돼서 (패스트트랙을) 막았다.”
―자유한국당은 이번 패스트트랙이 ‘의회 민주주의 유린’이라고 반발하는데.
“패스트트랙이란 게 소수의견을 존중해서 필리버스터도 하고, 51%로 막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최대한 지지기반을 확충해서 60% 이상의 가중다수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패스트트랙이라지만 기간을 260일로 해놓아서 ‘슬로트랙’이다. 그 법에 맞춰 절차를 밟은 걸 국회 운영 원칙을 저버렸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어떤 행태로든 선진화법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과 함께 올해 초에 선진화법 발전 방향에 대한 세미나를 했다. 내가 얻은 결론은 선진화법 자체의 규정을 바꿔서 예를 들면 의결정족수 60%를 65%나 55%로 하거나 적용대상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국회 운영원리를 바꿔야 된다는 거다. 선진화법의 개선 방향은 선진화법 조항을 바꾸는 게 아니라 국회 운영 일정, 의사일정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이른바 국회자동화법이라고 민병두 민주당 의원이 주장하고 내가 서명했다.
지난해 국회 본회의 개의한 날이 우리나라는 39일, 미국은 하원 138일, 상원 162일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은 1년치 국회 운영 일정을 공표하고 무조건 때가 되면 회의를 연다. 우리는 회의를 여는 것 자체가 교섭단체 간의 합의사항으로 돼 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게 해법인 것 같다.
지금은 국회 운영의 결정권을 의원들이 아니라 당 지도부, 심지어는 당 대표나 원내대표 한 사람이 가 갖고 있다. 심지어 국회법으로 2월, 4월, 6월 임시국회가 자동개회하도록 돼 있는데도 열지 않는다. 헌법에 있는 정기국회 개회일조차 안 지켜지지 않나. 의사일정을 명확하게 정하고 자동으로 국회가 열리도록 하는 것, 더 근본적으로는 국회에서의 의사일정과 의사결정의 주체가 교섭단체가 아닌 국회의원 개개인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정하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면 선진화법을 훨씬 살아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의원 중심 의사일정을 할려면 상임위 중심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상임위 의석 비율이 5.5대 4.5라고 했을 때 의원 개개인이 의사결정 주체만 된다면 4.5중에 1정도가 ‘그것은 필요하다, 여당 주장이 맞다’고 옮겨오면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당 주장에 동조해 여당 5.5 중 1.5정도가 옮겨오면 야당 주장이 관철된다. 지극히 당연한 원리다. 그런데 지금은 양당제의 잘못된 관행으로 모든 게 교섭단체간 합의가 있어야 한다. 더 심각한 건 군대식 조직으로 대장이 결정하면 졸병들은 ‘돌격 앞으로’ 이런 거다. 이것을 깨는 데는 헌법 고칠 일도, 국회법 고칠 일도 없다. 법에 명시된대로 헌법기관인 의원들이 자기 책임을 다하면 된다.”
―지금처럼 정당 지도부 중심으로 공천이 이뤄지고 국회직 인선 등이 이뤄지는 현실에선 쉽지 않은 일 같다.
“그런 정치 현실이 의원들이 눈치 보고 돌격대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진 않는다. 나는 이것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선진화법 제정한 게 몇사람 주장으로 된 게 아니다. 지속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의 성과였다. 나는 헌법 1조1항처럼 지당한 얘기인 ‘국회의 주체는 국회의원이고, 의원이 회의 참여와 의사결정에 대해 책임있게 독립적 헌법기관으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점을 법과 국회운영의 원리로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걸 추진할 생각이다. 찬바람 불면 본격적으로 여야 의원들을 규합해 볼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제도와 문화를 확립할 수 있나?
“먼저 법에 있는 대로 하면 된다. 정기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2월, 4월, 6월 임시국회도 자동으로 열리도록 돼있고, 몇째 주 무슨 요일에는 법안소위를 열어야 한다는 식으로 돼 있다. 이것을 무시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울러 교섭단체나 정당이 법과 국회 운영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패널티를 주자는 것이다. 교섭단체의 국고지원을 삭감하는 방법이 있고 의원 개개인에게는 세비를 삭감하는 식의 패널티를 도입하면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정당이나 의원에 대한 패널티를 누가 결정하나?
“선진화법은 회의 진행을 물리적으로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명확히 규정해 놓았다. 만약 국회의사일정 자동화법 같은 게 있다면 그것을 어기게 한 주체가 교섭단체이든, 원내대표이든 의원 개개인이든 그에 따라 제재하는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놓는다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패스트트랙 충돌 과정에서 고소·고발된 자유한국당 의원들 중 상당수가 총선에 못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명확한 실정법 위반이다. 해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다만, 쉽게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국회 운영을 선진화하기 위한 개혁 차원의 정치권 합의가 있고, 내가 얘기한 대안들이 정치적으로 합의돼서 제도화되는 큰 변화가 있다면 그땐 사정의 변경으로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의회 문화를 갖추기 위해 이렇게 법과 제도를 바꾼다, 그러면서 이런 게 미비했기 때문에 발생했던 문제들에 대해서는 당시 사정을 감안하면 좋겠다는, 정치적으로 합의된 의사표현 전달같은 것은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실정법의 문제니까 쉽지 않다. 국회의원이든 누구든 폭력에 관한 문제를 위반했을 때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일 오후 국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국회 정치개혁특위 위원이기도 한데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만으로 선거법을 처리하면 총선이 제대로 치러질까?
“선진화법 규정에 따라 60% 이상의 의결로 패스트트랙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이대로 갈 수밖에 없다. 다만 선거법이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세력이 빠진 상태에서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게 온당하냐는 근본적 문제제기가 있다. 이 두가지를 잘 조화시켜나가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가 국민의 뜻에 맞게 구성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당연하다. 이는 또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포괄하기 때문에 국회가 국민을 제대로 대변하게 된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해 국민의 뜻이 국회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자는 게 우리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당제가 될 수밖에 없고 국회가 다양성 원리에 기반해 타협 기조로 갈 것이다. 제도적으로 강경대치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선거제 개혁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자유한국당이나 우리당도 마찬가지지만 기득권의 최고 향유자다. 선거법 개정이 실제로 이뤄질 것 같으면 저쪽이나 이쪽이나 상대적으로 강도는 다르겠지만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선거법 개정과 맞물려 개헌 논의가 있는데.
“그동안의 논의를 지켜본 바로는 권력구조 문제는 상당히 좁혀져 있다. 결국 초점은 국무총리를 선임하는 데 있어서 국회 역할을 어떻게 증대시키느냐는 점이다. 국회가 총리 후보를 선출하거나, 아니면 복수 선출해서 대통령이 선택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권력구조 문제는 지난해 말 5당 원내대표 합의사항에 담겨 있다.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바로 이어서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개헌 논의도 하자는 것이었다.”
―총리 문제로 좁혀져 있다면 선거법 개정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현재 정개특위는 선거제도 개혁만 과제로 설정돼 있다. 현재의 정개특위 틀로만 풀기는 어렵다. 좀더 큰 정치적 협상을 통해 선거는 내년 4월에 치러야 하니까 연말까지 선거법을 처리하고, 개헌은 순차적으로 다음에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총선 때 개헌안을 부친다든가 총선 이후 1년 안에 개헌을 한다든가 이렇게 협상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지역 민심이 어떤가?
“민생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지역 분위기는 굉장히 침체돼 있고 부정적인 게 많이 생겼다. 금년 하반기에 민생경제에 새 활력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우리 정부와 민주당이 갖고 있는 역사적 소임, 즉 촛불정신의 계승과 완수라는 점에서 국민의 요구와 지지가 굳건하게 있다. 한편으론 당장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것, 일자리 없고 장사하는 분들 어려운 데서 생기는 생활상의 어려움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선거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가 결과로 나올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년차를 맞았는데 집권 후반부에 역점을 둬야 할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문제는 경제야’ 아니겠나. 경기침체나 일자리 감소는 구조적인 문제이고 세계경제와 연관돼 있다. 이런 상태에선 경제 환경의 변화가 중요한데 여기에 가장 효과적이고 가능성이 큰 게 남북관계 개선으로 인한 남북의 교류협력과 투자다. 문 대통령이 아주 잘하고 있는 만큼 잘 풀어내서 한국경제의 새 활력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
―최근 대북쌀지원 논란에서 보듯 남한내의 대북정책 이견이 극심한데?
“인도적 지원문제는 이것저것 따지지말고 좀더 적극적으로 해야한다. 이번에 5만톤 대북 쌀지원의 경우 내 생각보다는 보수 언론이나 야당의 반대가 크지않은 것 같다. 한반도 평화질서의 흐름이 명확해진다면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개 문제로 국내여론이 크게 갈릴 것 같진 않다.”
―부천시장을 두번 역임했는데 지방분권이야말로 나라 발전의 중요한 축이라는 얘기가 많다.
“강고한 중앙집권적 의식과 조직체계가 지배하는 탓에 지방분권이 유리천장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대통령이나 우리 당이나 지방분권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유리천장이 두꺼운 탓에 어려운 것이다. 좀더 과감하게 제도의 벽을 깨는 노력을 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같이했는데, 그때의 추억이 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하고 통추를 같이 한 게 영광이다. 디제이(DJ)가 국민회의 만들 때 쫓아가는 게 순리처럼 돼있었는데 반대로 행보를 해서 나도 (총선에서) 떨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정치인들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줬고 이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kcbaek@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의 첫 ‘입각 제안’ 받은 정치인
원혜영 의원은 누구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두루 활약한 5선의 중진 정치인이다. 풀무원 창업자, 부천시장, 민주당 원내대표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소탈하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는 평을 듣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부천시장이던 원 의원에게 행정자치부 장관 입각을 제의했다. 두 사람은 1996년 총선에서 디제이(DJ)가 창당한 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만든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몇몇 통추 멤버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입각을 제안하자 원 의원은 “입각 제의는 한 자리당 두 명씩만 하시라”며 자리 약속을 남발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노무현은 곧바로 정색을 하면서 “장관 자리 제안은 원 시장이 처음”이라고 했다고 한다. 노무현이 입 밖으로 꺼낸 참여정부의 첫 장관 후보자가 원 의원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대선 뒤 당선인 신분으로 입각을 정식 제안했지만 원 의원은 부천시장에 취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그만두는 건 유권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두 번의 부천시장 시절 원 의원은 부천을 경쟁력 있는 문화도시로 탈바꿈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버스도착 안내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해서 한국은 물론 세계로 확산시켰고, 회계업무에 단식부기 대신 복식부기를 도입한 건 전국으로 퍼졌다.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를 만들어 수준급 영화제로 키웠다.
주행거리가 45만㎞ 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정치인답지 않은 소탈한 행동거지를 보였다. 학생운동 출신으로 옥고를 여러 차례 치른 뒤 만 30살에 풀무원을 창립했고, 경영이 본궤도에 오르자 6년 만인 1986년 민주화운동으로 복귀했다. 1996년 풀무원에 남아 있던 상표권 지분을 사회에 기부해 장학재단을 세움으로써 일찌감치 기부문화를 실천한 정치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