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5당 원내대표가 지난해 12월15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선거제도 개혁 관련 합의문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자유한국당 나경원,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물꼬가 트이는 듯했던 선거제 개혁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선거제 합의안을 도출해냈지만, 이를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는 단계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선거제 개혁안 패스트트랙 지정을 “좌파독재정권 연장”을 위한 “날치기”이자 “야합”이라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막말’을 동원한 정치 공세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주도해 2012년 여야가 합의처리한 국회법 개정안(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은 ‘안건 신속처리제도’(패스트트랙)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엔 법률안, 예·결산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국회선진화법의 기본 정신은 과거 다수당의 ‘날치기’ 관행을 반성하고 국회의 합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문제는 합의를 중시하다가 나타날 수 있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비상조처로 제시된 것이 패스트트랙이다. 본회의 또는 소관 위원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재적 의원의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돼 최장 330일간의 심사를 거치게 된다. 패스트트랙은 국회가 정식 심사를 하게 되는 첫 단계이지, 이 자체가 의결이 아니다. 각 당은 심사 기간에 다른 수정안을 제시해 함께 논의할 수도 있다.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것 자체를 ‘날치기’로 규정하는 것은 왜곡이다.
자유한국당은 차치하고, 패스트트랙의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바른미래당에서 발생했다. 현재 바른미래당은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격렬하게 맞선 상태다. 바른미래당의 이질적인 정체성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분출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단식이 선거제 개혁의 불씨를 지폈는데, 이제 와 그의 소속 당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얼핏 정치 공방처럼 보이지만 선거제 개혁의 본질은 한국 정치의 체질개선이다. 선거제 개혁은 유권자의 한표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 다양한 계층·연령대·소수자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국회의원들이 민원과 행사로 점철된 ‘지역구 정치’에서 벗어나 정책과 입법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여야 4당이 합의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에서 75석으로 늘리고, 각 정당이 국민들에게 받은 지지율을 반영해 ‘최소 의석’을 보장(비례성 강화)하는 것이다.
‘비례성 강화’를 위한 시도는 20대 총선을 앞둔 2015년에도 이뤄진 바 있다. 당시 새누리당 소속으로 국회 정개특위 위원장이던 이병석 의원이 제안한 선거제 개혁안은 △정당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되 절반만 배분하고 △그 이상은 병립형으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번 여야 4당의 개혁안과 흡사하다.
자유한국당은 이번 개혁안의 비례대표 배정 산식이 복잡하다는 점을 공격 지점으로 삼고 있다. 쉽기로 치자면 자유한국당이 내놓은 선거제가 제일이다. 의원 수를 10% 줄이고 비례대표를 없애 270석 전체를 지역구 의원으로 채우겠다는 내용이다. 정치 혐오를 기반으로 한 자유한국당의 안은 정치인의 자기부정이자 ‘제 얼굴에 침 뱉기’다.
여야 4당의 개혁안에서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 의석수를 계산하는 방식이 까다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기본 ‘산식’에 따라 자동 계산되고, 무엇보다 유권자의 투표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속한 지역구 의원 1표, 지지 정당 1표 등 2장의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은 현재와 같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사표’가 될 수 있는 나의 한표를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 선거제 개혁의 핵심은 어느 당의 유불리가 아니라, 유권자의 표심이 국회에 가능한 한 온전히 반영되는지 여부다.
다만 ‘꾸러미’ 법안(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5·18 왜곡 처벌법)이 엮이며 여야 4당의 계산이 엇갈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까지 깔리면서, 논의가 다시 본궤도에 오르긴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인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정치개혁 드라마’의 결말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아니, 제작은 가능할까. 국민의 눈이 국회에 쏠려 있다.
최혜정 정치팀 팀장 id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