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으로 돌아간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지난 29일 부산 봉생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 앞서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그는 이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재선을 생각하지 말고 한번을 하더라도 의원다운 의원이 되기를 바란다”고 후배 정치인들에게 당부했다.
▶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대통령선거 직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전직 국회의장이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고, 20년 전의 자리인 병원장(봉생의료원장)으로 돌아갔다. 장인(김원묵·1974년 작고)을 이어 그가 키워낸 부산진역 앞과 동래에 있는 두 봉생병원을 일주일에 이틀씩 번갈아 출근한다. 조용한 정계은퇴다. 최근 자서전 <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를 낸 그를 지난 29일 봉생병원에서 만났다.
“국회가 행정부의 하수인, 즉 통법부나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게끔 의회를 지킨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당당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인 정치인의 발언은 깎아 들어야 하지만, 정의화(69) 전 국회의장의 말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국회의장(2014년 5월~2016년 5월)으로서 그만한 일을 했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 평가에 인색한 최장집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조차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민주주의 규범과 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와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실제로 행위하는 정치인들을 본다는 것은 진정 흔치 않은 일”이라며 그중 대표적인 한 명이 “바로 정의화 전 의장”(<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 권두언)이라고 말했다.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
경제활성화법 직권상정 거부
“목에 칼 와도 옳은 일 지키고
불의 못 참는 ‘또다른 나’ 있어”
“실패한 정권 교체되는 건 순리
수구적 보수 떨쳐야 새출발 가능”
“의원 임기 4년은 귀중한 시간
다음 선거 생각 말아야 롱런”
―20년 만에 낙향한 소감은 어떤가?
“공허함 같은 게 약간 있었지만,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단계인 만큼 사람에 대한 집착과 욕심 등 모든 마음을 비웠다. 그랬더니 하루하루가 아주 편안하다.”
―국가 의전서열 2위였고 한때는 대선주자로서도 거론됐으니 마음 비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대선후보로 나가라는 유혹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있었고, 나 역시 한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의장 공관을 비워주기 위해 짐을 싸다가 공자가 쓴 ‘지불가만’(志不可滿)이라는 글을 우연히 봤다. ‘바라는 바를 남김없이 채워선 안 된다’는 뜻이다. 박수받을 때 떠나야지 더 욕심을 내다가는 패가망신하기 딱 알맞다는 깨달음이 왔다.”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은 “과잉” 비판받아
―대선 국면에서는 이른바 제3지대를 구성하려고 노력했었는데.
“그것은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를 바꾸려던 구상이었다. 탄핵이 아니었다면 대선을 12월20일에 치를 텐데 그 대선과 다음 21대 국회의원 선거(2020년 4월) 때까지 개헌과 선거구제 등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서 일단의 그룹을 만들려고 했다. 그룹이 만들어지면 내가 심판이 돼서 그 안에서 한 명을 대선후보로 내세우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김종인, 김무성, 손학규 등 참여자들이 동상이몽이어서 결국 깨지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일체의 공식 활동을 접었다.”
―되돌아보면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매우 높았다. 제3지대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 나도 이번에는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이 순리라고 봤다. 이명박 정권도 성공한 게 아니었지만, 박근혜 정권에 일어난 일들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여당은 완전히 사당화됐다. 또 행정부 수장이 입법부 수장에 대해 3권분립이 된 대의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국민이 바보가 아닌데 이렇게 실패한 정권을 다시 연장시키겠는가. 성공 가능성이 극히 낮았음에도 (제3지대를) 추진했던 것은 설령 우리가 안 되더라도 차기 정권을 맡게 되는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과제를 명확하게 인식시켜주고 싶었다.”
정의화는 이만섭(2015년 작고)과 함께 역대 국회의장 가운데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굳건히 만든 인물로 꼽힌다. 2015년 말부터 이듬해 상반기까지 이른바 경제활성화법안 등을 직권상정해달라는 청와대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선례로 인해 앞으로 정권이 아무리 중시하는 법안이라도 과거처럼 의장이 일방적으로 본회의에 상정해서 처리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20년 동안 비주류 정치인이면서도 국회의장에 당선돼 의회 민주주의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지난 29일 부산 봉생병원 의료원장실에서 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의회가 행정부의 거수기가 되는 것을 막은 데 대해 자부심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 청와대는 정무수석(현기환)을 국회에 보내는가 하면 대통령까지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직권상정을 다각도로 압박했다. 재계와 보수언론 등도 가세했다. 버티기가 힘들지 않았나?
“나는 내가 봐도 특이하다. 평소에는 겸손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또다른 정의화’가 된다. 올바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강해진다. 그때 청와대의 온갖 압박을 받으면서 ‘이거 어쩌지’ 하는 걱정은커녕 ‘그래! 한번 해봐’라는 심경이었다.”
그는 <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에서 당시에 대해 “나의 입장은 확고했다. ‘정의화’를 ‘불(不)의화’로 성을 바꾸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6년초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했다. 비상사태로 해석한 것은 과한 것 아니었나?
“그렇게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상사태는 아니었으니까 나 역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당시에 북한 등 외부세력의 테러 위협이 실제로 있다고 국정원에서 보고도 했지만, 미래의 위험에 대해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국회 자문 법률회사 두 곳 중 한 곳에서 조건부로 비상사태로 볼 여지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법안의 독소조항을 고치도록 해서 법을 처리했는데 국민의 생명과 직결돼 있기에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장준하 선생은 타살” 용기있는 발언
부산에서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병원 경영자였던 정의화는 김영삼 정권에 의해 발탁돼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그는 20년 동안 정치생활을 하면서도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고 주로 비주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경선 때는 대세를 형성했던 이회창 대신 이수성과 최병렬을 각각 지지했다. 세력이나 힘보다는 대의를 중시하는 반골 기질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도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 때 의문사했던 장준하(1975년 작고) 유골이 묘 이장 과정에서 나왔을 때였다. 머리 뒤쪽에 지름이 6㎝쯤 되는 원형 구멍이 확연했다. 정의화는 트위터에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라는 글을 썼다. 당시 여당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한 발언이었다.
―몇달 뒤면 아마도 대통령이 될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다. 더구나 당시에 19대 국회의 국회의장을 할 마음을 갖고 있었지 않나.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 것 같은데.
“물론 당시에도 의장에 도전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 유골을 보는 순간 오로지 억울한 죽음을 바로잡아서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우리 당 후보에게 도움이 될 건지 아닌지는 아예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글이 나가자, 정의화 저놈을 죽여야 한다는 등 친박계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그들에게 ‘박 후보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의화 의원 말대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말하면 엄청난 지지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더라.”
―최고 권력자와 당 주류에게 찍혔음에도 2014년 국회의장 후보 당 경선에서 친박근혜계가 민 황우여를 101 대 46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이겼다. 공천이나 자리를 얻으려고 권력에 굴종하거나 아부하지 않고도 성공했는데 비결이 뭔가?
“그동안 정치를 하면서 유력자를 쫓아다니지 않았고, 내가 세를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만나거나 한 적이 없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임에도 의사로서나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을까를 생각하면 딱 한가지인 것 같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을 지킨다. 인간이니까 가끔 엇나가기도 하지만, 그러면 다시 조정하고 또 조정해서 바른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이 진심을 알아줘서 보은을 받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진인사 대천명이다.”
2011년 11월22일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이 단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최루탄을 터뜨린 뒤 정의화 당시 국회부의장이 있는 의장석에 최루가루를 뿌리고 있다. 정 당시 국회부의장은 최루가루를 털어낸 뒤 자리를 정돈하고 본회의를 열어 에프티에이 비준안 및 관련 법안을 처리했다. 노컷뉴스 제공
―정치 인생에서 가장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뭔가?
“정치를 한 것 자체가 내게는 보람인데 그중에서 특히 의미를 찾는다면 대의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는 등 민주주의에 충실했던 점이다. 의회가 행정부의 하수인 즉, 통법부와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게끔 의회 권력을 지킨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내 조상이나 하늘이 나를 일반 의사와 다른 길로 가게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정의화는 선비 집안 가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한말 일제의 단발령을 거부하면서 경남 양산군수 자리를 버린 할아버지, 도쿄에서 검찰시보로 임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해 고향에 학교(웅동고등공민학교)를 세운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컸다. 가문의 조상인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는 어릴 때부터 그의 롤모델이었다. “중2 때 아버지를 따라 포은 묘를 참배한 뒤부터 그분의 강직함과 기개를 늘 가슴속에 간직했다”고 말했다.
1985년께 집안에서 있었던 호적 사건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개업의였던 형이 그간 모은 돈으로 동방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려고 할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정의화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상호신용금고라고 하지만 이게 현대판 고리대금업 아닙니까? 승낙하시면 안 됩니다. 꼭 하시겠다면 제 이름을 호적에서 파내고 하십시오”(<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라고 그 자리에서 말했다. 상호신용금고 인수는 없던 일이 됐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세력이 대선 이후 국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보수는 본래 국민화합과 통합에 앞장서는 합리적 보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는 그런 역할은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지역에 기대고 권력을 누리는 쪽으로 갔다. 그 결과 진정한 보수의 가치는 약화되고, 따뜻한 보수는 점점 없어졌다. 대신 가진 자의 리그에 얹힌 웰빙 정당으로 바뀌었고, 때로는 사당화됐다. 보수가 살려면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절 한번 하는 쇼가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된 새출발을 해야 하는데 자유한국당의 지금 양태는 종잡을 수가 없다. 뭐가 변했고 뭐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수세력은 자유한국당 쪽으로 몰리고 있지 않나?
“인위적으로 보수 재편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정책적인 차이를 가지는 다당제로 가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국민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른바 수구적 보수를 떨쳐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렵겠다는 사람은 정계를 떠나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세력만 이쪽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또 하다가 안 되면 서로 쪼개지고 합하는 것은 국민의 눈에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적폐청산 목표는 국민통합이 돼야”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적폐청산을 인적으로 해서는 안 되고, 제도나 관습으로 가야 한다. 또 적폐청산의 목표를 국민통합으로 해야 한다. 목표가 그렇게 되면 방법도 달라질 수 있다. 지난 촛불 때 국민들의 염원이 뭐였나. 공정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국민의 뜻을 문재인 대통령이 잘 수렴해서 국민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주기를 바란다.”
20년 전 서울에 올라올 때 그는 병원에서 입던 수술복을 가져와서 잠옷으로 사용했다. 너무 낡자, 새 수술복으로 교체했다. 환자를 수술하는 심정으로 여의도 정치를 고치겠다는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치가 한번의 수술로 바뀔 사안이 아니긴 하지만, 그는 한국 정치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의원들에게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한번이든 두번이든 의원다운 의원을 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의원 4년은 엄청나게 귀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다음 4년을 위해 밤낮으로 밥 먹고 술 마시면서 허송하는 것은 어리석다. 지역주민이 마음속으로 인정하면 저절로 다선이 가능하다.” 실력자에게 찍혀서 맞았던 두번의 공천 탈락의 위기를 구명활동이 아니라 오로지 유권자 평판에 의해 극복했던 그이기에 후배 정치인에게 주는 당부가 무게감있게 다가왔다.
부산/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