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금도 <대망>을 읽고 있을까. 조자룡이 첫사랑이었을 정도로 <삼국지>를 좋아한다는 그였다.
“야망을 크게 가져라 그겁니까? 거 일본사람 소설 덕천가강이 이곳에선 대망이란 제목으로 나돌더군요. 대망…. 그래서 그런지 삼국지만큼 팔린다는 소문이고 독자는 정치인들에게 많다던가?”
박경리의 소설 <단층>에서 1974년 4월의 수용과 윤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간 유신의 긴급조치 아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망을 읽었다.
박 전 대통령은 왜 대망을 독방 안으로 들였을까.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뒤에도 읽었다. 1997년 12월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후 20년 가까이 그와 정치를 함께 한 자유한국당 사람들도, 바른정당 사람들도 고개를 까딱할 뿐이다. “시간이 많은가….”
1996년 8월 1심 재판장의 사형선고를 듣고 안양교도소 독방으로 돌아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망을 읽었다. 그러고는 이양우 변호사를 만났다.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했으니 잘못된 재판을 바로잡아 역사에 주름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박 전 대통령이 대망을 읽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가 유영하 변호사와 함께 1심 재판을 걷어차기 직전이었다. 난세의 지혜, 처세의 교본, 출세의 경전, 인내의 심법, 권좌에서 물러난 이들의 필독서라는 세간의 평을 믿은 것일까.
“대구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혁명을 꿈꾸던 곳이며, 억울하게 탄핵되시고 인신감금되신 박근혜 대통령님이 태어나신 곳이며 정치적 고향입니다. 죄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구속연장한 것은 살인적 정치탄압이며 정치적 인신감금 행위입니다. 법치를 존중하시던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정치적 옥중투쟁을 선언하셨습니다. 문재인 좌파독재정권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훼손되고 전쟁의 먹구름이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보수우파의 성지이며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인 대구에서 대한민국의 진실과 정의를 되찾고 좌파독재에 망해가는 대한민국을 구하는 선봉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죄가 없다! 대구·경북인들이여 깨어나라! 대구·경북인들이여 일어나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첫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던 지난달 28일. 대한애국당 대표인 조원진 의원은 티케이(TK)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근왕병’을 자처한 태극기부대가 대구 반월당 앞에 모였다는 소식이,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의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친박의 일원으로, 여당의 원내수석부대표로 실세의 언저리를 배회하던 조 의원이었다. 그는 웃으며 지나가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서 울던 2015년의 국회 본청 입구 바로 그 자리에서 지난달 “대통령 박근혜의 죄 없음”을 말하며 보름 가까이 단식했다.
대한애국당 조원진 공동대표와 당원들이 지난달 10일 오전 국회 본관 2층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 창문 앞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 석방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영남지역의 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집착에 가까운 조 의원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태극기집회에 한번 나갔다가 단상 아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착각’한게 아닌가 싶다. 애초 태극기부대에게 대선 후보는 김진태 의원이었다. 선거법 재판에 걸린 김 의원에게서 조 의원으로 갈아탄 것 아닌가.” 대한애국당은 1일 국회 앞 빌딩에 중앙당 사무실을 열었다. 의석 하나를 가진 대한애국당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념의 맨오른쪽에 있던 자유한국당은 왼쪽으로 조금 밀려났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작과 함께 새누리당을 취재하면서 말이 통하는 보수정치인을 찾아나섰다. 그런 정치인이 이 당에서 살아남아야 한국정치도, 한국사회도 그럴듯해 질거라 믿었다. 친박 위세가 워낙 등등하던 시절이라 “당이 이래서 되겠어요”라는 <한겨레> 기자의 푸념을 귀담아 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서청원 의원(왼쪽)은 ‘성완종 리스트’1억 수수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았다고 폭로하며 관련 녹취록의 존재를 암시했다.
새누리당에 가을이 훅 찾아왔다. <한겨레>가 최순실의 이름을 처음 지면에 올린 지난해 9월20일은 보수여당에 9년만의 가을이 시작된 날이었다. 처음부터 ‘의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년 전 오늘 김무성 의원은 이정현 대표 등 새누리당 친박계 지도부의 퇴진을 공개 요구했다. 초·재선 의원들도 ‘최순실 사태 진상규명과 국정 정상화를 위한 모임’을 꾸렸다. 나름 절박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새누리당은 “무차별 국정 흔들기, 정부 흔들기, 근거 없는 폭로”(정진석 원내대표), “(야당의 미르재단 검찰 수사 촉구는) 남녀가 손 한 번 만졌는데 애를 왜 안 낳느냐는 식”(김진태 의원), “나도 연설문 쓸 때 친구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이정현 대표)며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을은 짧아 겨울이 빨랐다. 그해 10월 말부터 여의도 한강 칼바람 못지 않게 겨울바람이 맵찬 서초동 검찰청과 역삼동 박영수 특별검사팀으로 4개월여를 출근했다. 국회 탄핵안 가결을 두고 다투던 새누리당은 그새를 못 참고 당이 쪼개졌다.
‘어즈버 백년정당이 꿈이런가 하노라’. 올 3월 초 파견 마치고 여의도로 돌아와보니 당이 두동강 났다는 말이 실감됐다. “이제 어느 당 출입이야?” 얼마 전까지 ‘우리 모두는 친박’이라던 이들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뉘어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고 있었다. 국회의원도 보좌진도 당직자도, 기자도 남부여대 갈라졌다.
그리고 3월10일, 대통령이 탄핵됐다. 2016년 3월10일 ‘알파고가 인간을 이겼다’며 통탄해하던 언론들은 1년만에 ‘촛불이 대통령을 이겼다’고 알렸다. 그날 페이스북에 “알파고로는 민주주의 못한다”며 한껏 폼을 잡았지만 내심 보수정당의 오늘과 내일이 걱정됐다. 말이 통하는 보수정치가 있어야 진보정치도 삶에 착근하며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여야가 막무가내로 맞붙는 국회에 있다보면 그런 고민은 늘상이다.
나만의 ‘개똥정치학’일까 두려워 정치학자와 정치평론가에게 물었다. 그들은 몇 가지 전제를 달면서도 “2018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는 존속할 것”이라며 바른정당의 생명력을 높게 봤다. 합리적 보수의 공간이 드디어 열렸다며 보수의 분화를 예견했다. 내가 크게 틀린 거 같지 않아 반가웠다. 다만 바른정당은 대선을 거치며 전문가들의 기대섞인 전망이 무색하게 금방 흔들렸다. 대학생 아들과 함께 한겨울 촛불집회에 나갔다는 의원은, 지금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려 한다. 새누리당 재창당을 요구하며 선도 탈당했던 김무성 의원이 이번에도 탈당의 선봉에 섰다.
지난 9월 10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 바른정당 소속 의원 18명이 모인 자리에서 유승민 의원(오른쪽)과 김무성 의원이 ‘러브샷’을 한 뒤 입을 맞추고 있다. 바른정당 제공
“강경극우화할 것”이라는 자유한국당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맞았다. 홍준표 대표는 대선 기간 기행에 가까운 막말과 시대에 뒤처진 색깔론으로 표를 모았다. 최종 득표율 24%에 대해 “당은 바닥이었는데 내 개인기로 이 만큼 나온 것”이라고 자평했다. 지난 7월 당권을 잡은 뒤로는 반공·시장보수라는 구시대의 손쉬운 동원정치를 답습하며 1950년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듯싶다. 국내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주사파 정권”이라는 막무가내 색깔론으로 일관하더니, 지난달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서도 “한국 정부의 주류는 친북좌파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당 혁신위원장에는 본인 스스로 “태극기 집회에 굉장히 열심히 나갔다”고 말하는 류석춘 교수를 모셨다. 당에서 기자들에게 나눠준 수첩의 표지는 ‘혁신새누리당’에서 ‘자유대한민국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라는 총력안보식 구호로 바뀌었다. 혁신하겠다는 정당정치의 일신우일신 다짐은 당명과 함께 사라졌다.
기자도 자기가 쓴 기사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도 자기 말에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의도의 언어는 그 논리와 정합성보다는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유통기한이 더 중요하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명제는 정치의 변덕스러움과 함께 짧은 유통기한을 포장하는 수단이다. 여야 모두 그 유통기한이 짧은데, 말의 부패 속도는 보수정당이 유독 빠른 편이다. 박 전 대통령과 친박에 대한 홍준표식 오락가락이 대표적이다. 1년째 이어지는 자유한국당식 좌충우돌과 지리멸렬의 원인이기도 하다. “양박(양아치 친박)”을 주장하던 홍 대표는 대선 닷새 전 갑자기 “국정농단 문제가 있었던 친박들은 다 용서하자”며 서청원, 최경환 의원 등에 대한 당원권 정지 징계를 풀어줬다. 도로 친박당 비판이 쏟아졌지만 “친북정권을 막아야 하니 친박, 비박 모두 하나가 돼야 한다”고 했다. 2주일 뒤에는 돌연 ‘친박퀴벌레’를 주장했다. “박근혜 팔아 국회의원 하다가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었고, 박근혜 감옥 가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나와 당권이나 차지해볼려고 설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참 가증스럽다.” 대선에서 패한 뒤 당권 도전을 위해 순식간에 친박 비난으로 유턴하자, 친박계는 “낮술 마셨냐“고 맞받았다. 그런 친박계를 향해 “육모방망이로 뒤통수를 뽀개버려야 한다“(정진석 의원)는 말까지 나오며 당은 또 엉망이 됐다. 보수통합을 명분으로 서청원·최경환 의원 징계를 손수 풀어줬던 홍 대표가, 이번에는 보수통합 명분으로 ‘1호 당원 박근혜’ 출당과 서·최 두 의원의 제명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 의원과 홍 대표는 ‘성완종 리스트 수사 무마 청탁’, ‘사면 청탁’까지 서로 폭로하며 보수정당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자해극을 벌이고 있다. 이제 자유한국당 친박 의원들은 대통령 탄핵 증거인 태블릿피시가 조작됐다는 주장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는다. 구속 연장을 두고는 당 전체가 한목소리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을 주장한다. “박근혜는 정치적으로 이미 죽었다”더니 흡사 ‘유훈통치’를 따르는 듯 하다.
‘촛불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왜곡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툭하면 국회를 박차고 나간다. 횃불이라도 들어올릴 기세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9월 초 정기국회를 거부하며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장외투쟁을 했다. 지난달 26일에도 ‘문재인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공영방송 근조’를 주장하며 야당의 무기인 국정감사를 돌연 보이콧했다.
“왜 또 나가요? 금방 들어올거면서….” 자유한국당 한 의원에게 ‘언제 들어올거냐’고 물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 당은 ‘김정은’하고 똑같아. 입으로 떠들 수밖에 없잖아. 그나마 김정은은 핵이라도 있지….” 북한 조선노동당과 남한 자유한국당의 유일한 차이는 핵 보유 여부라니 그만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나흘 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국감 복귀를 선언하며 “국감 포기가 아닌 국감 중단이었다. 야당의 서러움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힘 없는 야당의 최소한의 항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환멸을 느껴 당에서 몸을 뺀 한 인사는 최근 홍준표 대표와 친박 서청원 의원과의 계급장 뗀 진흙탕 싸움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문재인 대통령한테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최상의 국정 파트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나.”
없는 집 제삿날 돌아온다고 지방선거가 벌써인데 ‘보수의 능참봉’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얻는 것은 별론데 힘 들고 폼 안 나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 <남한산성> 속 ‘뱃사공’과 ‘서날쇠’도 이제는 역사와 개인, 정치와 삶을 따로 보지 않고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여기 보수정당에는 싸우자는 ‘김상헌’도, 살자는 ‘최명길’도, 당면할 일을 당면한다는 ‘김상용’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여의나루를 지키는 뱃사공을 자처하며 올겨울 강 위로 ‘공천’을 건네주고 ‘곡식’을 얻을 요량이다. 여의도의 서날쇠들은 봄은 아직인데 풀무질한 금배지를 두드릴 생각이 앞서 흐뭇하다. 국회 정론관 기자실에 앉아 있자니 계절 바뀐 줄 모르는 가을모기가 손바닥 사이에서 죽었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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