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서 김미화·한비야씨 등 주변 인물들 품평
김구 선생에 대해선 “시한부 신탁통치 수용했어야” 아쉬움 토로
김구 선생에 대해선 “시한부 신탁통치 수용했어야” 아쉬움 토로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화신이었다. 시인 고은이 쓴 <만인보>의 ‘김대중’편 첫 구절이다.
김 전 대통령 자서전에는 <만인보>만큼 다양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담겨있다. 1924년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해방 이후 정치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격렬한 좌우대립 속에 1947년 암살당한 여운형은 “해방 공간에서 민족을 구하려 동분서주했던 빼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가장 흠모한 한 사람은 김구였다. “김구 선생은 진정 애국자였다. 어른을 잃은 국민들은 위인의 자취를 기리며 비탄에 젖었다.”
김 전 대통령이 김구 선생을 존경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자서전에선 김구 선생을 정치인으로 평가한 대목이 눈에 띈다. 김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은 독립투사였고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좌우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했다.” 김구 선생이 5·10 총선에 참여해 권력을 잡았다면 친일파에 의한 독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김 전 대통령은 한탄했다. 그가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갔던 박 전 대통령과 딱 한번 만났다 . 국회의원 당선 뒤 1968년 새해 인사에서 선 채로 짧게 인사했다. 박 전 대통령은 매우 친절했고 성의있게 답했다. 거기까지였다. 김 전 대통령은 납치 사건을 겪는 등 박정희 정권에서 모진 탄압을 받았다.
화해는 뒤늦게 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2004년 8월 김대중도서관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드립니다”라고 사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만인보’는 서거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강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명박 당선자의 국정운영이 걱정됐다. 과거 건설회사에 재직할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자신의 일생일대 업적인 남북화해 정책을 역류한 이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도 표출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정책에 공감한다고 여러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고 대세에 역행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그는 실용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정치인에 멈추지 않는다.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씨에 대해서 “여러 인종의 세 아이를 입양하였다니 고개가 숙여졌다”고 칭찬했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대해서는 “평소 개그우먼으로 김미화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시사 자키의 자질도 상당해서 놀라웠다”고 즐거워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만인보’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역설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김 전 대통령의 ‘만인보’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고 역설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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