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오는 19일 정의당이 새 대표를 선출한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참패 뒤 정의당은 존재감을 잃고 외면받는 ‘그들만의 리그’로 추락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고 있다. 새 대표는 당명 개정부터 노선·정책의 혁신까지 당의 존립을 건 재창당 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2012년 창당 이래 양당체제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꾸려온 정의당의 존폐만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창당 전후 25년 진보정당 운동의 앞날까지 새 지도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주생태사회주의’를 내건 김윤기 후보와 ‘제3지대 재창당’을 공약한 이동영 후보, ‘국민의 노동조합’을 외치는 이정미 후보, ‘당원의 힘’을 강조한 정호진 후보, ‘타락한 한국 정치를 부수자’며 나선 조성주 후보(이상 가나다순)까지 5명의 후보가 당권에 도전한 가운데 14일 온라인 투표가 시작된다. 19일 선거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승부는 28일 결선투표에서 가려진다.
노회찬·심상정 이후 정의당의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줄 새 대표는 누가 될까. <한겨레>는 12일 경선에 출마한 5명의 후보에게 정의당이 나아갈 길을 물었다. 재창당의 방향, 당의 정체성과 지지 기반, 연합정치의 전망과 1호 정책 등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 정의당이 마주한 질문들이다.
걸어온 길을 보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 정의당 대전시당위원장과 부대표를 지낸 김윤기 후보는 진보정치 25년을 대부분 대전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지역을 가장 잘 아는 후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도솔산 대규모 아파트 건설 저지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와 ‘대전시립병원 설립 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는 등 지역 현안에 천착한 정치활동을 해왔다. 김 후보는 “저는 지역 현장에서 노동자가 싸워야 할 일이 생기거나 환경 문제가 발생하면 진보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연대해야 이길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며 “지금 정의당에는 지역에서 성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 관악구의회 의원과 정의당 수석대변인을 지낸 이동영 후보는 진보정당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의 기초의회에 진출해 8년 동안 의정활동을 한 경력을 앞세우고 있다. 거대 양당과 대화하며 설득하고 협의한 경험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후보는 “친환경 무상급식 등 진보정당의 의제를 제도화하고 다른 당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정치 공간이 훨씬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며 “‘진보적이지만 대화에도 강한 정당’이라는 노선으로 이끌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정미 후보는 20대 국회의원과 당대표를 지내 대중적 인지도가 가장 높다. 현재 당내에서 인지도나 영향력으로 심상정 의원과 겨룰 유일한 인사다. 그만치 이 후보에겐 경륜이 무기다. 이 후보는 “저는 20대 국회에서 끈질기게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성과를 냈고, 당대표 시절에는 ‘데스노트’(정의당이 부적격으로 지목한 장관 후보자들이 낙마한 데서 붙여진 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정부에 비판할 부분에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며 “저는 승리의 경험을 가진 후보”라고 말했다.
청년유니온 창립에 참여하고 서울시 노동전문관·노동협력관을 지낸 조성주 후보는 자신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노동운동 밖의 노동, 청년유니온과 경제민주화운동본부 등 기존 진보가 대표하지 않았던 것들을 대표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시에서 기업과 노조의 입장을 중재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해왔고, 전통적인 재벌과 노동자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등 복합적인 불평등 문제를 고민해왔다”며 “(저야말로) 다양한 갈등이 충돌하는 시대에 가장 걸맞은 리더십”이라고 설명했다.
정호진 후보는 노회찬 전 의원의 비서관과 당 수석대변인을 지냈다. 1997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진보정당에 몸담아온 그는, “진보정치의 흥망성쇠를 같이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최근 당내에서 ‘비례대표 총사퇴 권고 당원 총투표’에 앞장섰던 경험을 각별하게 기억한다. 정 후보는 “많은 분들이 당원 총투표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성사시킨 당사자”라며 “정의당이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당원들의 힘을 모아갈 수 있는 에너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하는 시민들의 정당’ 답 모였지만, ‘페미니즘 정치’ 두고는 인식차
“일하는 시민들, 노동자를 위한 정당”, “양당 어디에도 의탁할 수 없는 시민을 위한 정당”. 누구를 위한 정당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후보들이 내놓은 답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 정의당의 나아갈 길이라는 데 후보들 사이에 이견은 없다. 다만 ‘6411 버스’로 상징되는 소외된 노동자를 대변할 것인가, 새롭게 등장한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에 무게를 두고 지지 기반 확장을 노릴 것인가를 두고는 의견이 갈렸다.
이동영 후보는 “기존의 전통적 노동 기반을 확보하면서도 새롭게 대두되는 미조직 비정형 노동자 문제들로 확장해야 한다”며 “블루·화이트칼라뿐 아니라 ‘핑크칼라’(비정형·비조직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를 위한 노동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성주 후보는 “정치적으로는 극단화되고 타락한 양당 정치에 동의하지 않는 ‘제3시민’, 경제적으로는 프리랜서나 플랫폼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노동시민’이 정의당의 가장 중요한 지지 기반”이라고 말했다. 김윤기 후보는 노동자·여성·청년·장애인 등의 범주 구분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해를 받는 피해 당사자들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호진 후보는 당이 가난한 서민, 소외된 비정규직 노동자 등 전통적 지지 기반에 충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정 후보는 “10년 전 노회찬 전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6411 버스의 투명인간을 이야기했지만, 정의당이 땀 흘려 일하는 시민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했었는가 돌아봤을 때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정미 후보는 “정의당이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임을 분명히 하되, 우리 시대의 복잡한 노동이라는 과제를 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후보들 간 인식차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전선은 장혜영·류호정 의원 등으로 상징되는 당내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평가다. 정호진 후보는 “정의당의 페미니즘 정치는 새벽 첫차를 타고 일터에 나가는 여성 노동자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분들을 설득하는 작업 없이 의원들이 자기정치를 하는 방편이 됐다”고 비판했다. 반면 조성주 후보는 “지금까지 지도부가 두 의원으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정의당의 정치언어로 만드는 작업을 소홀히 한 채 거리두기만 해왔다”고 지적했다.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정치판에서 6석 의석의 소수정당이 취하는 정치 전략은 지도부의 성패를 가른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과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법’ 처리 과정에서 정의당 지도부가 내린 선택엔 ‘민주당 2중대’란 비판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후보들은 소수정당으로서 법안 통과 등 정치적 성과를 내려면 연합정치가 불가피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정미 후보는 “우리가 대변하려는 국민에게 필요한 입법을 통과시키려면 연합정치가 필요하다”며 “다만 당의 자강이 모든 것의 전제”라고 강조했다. 이동영 후보 역시 “중심이 있으면 원칙에 따라 유연하게 연합정치를 하고 대화와 타협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호진 후보는 나아가 “(비례대표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구를 돌파해야 유효정당으로서 정의당이 설 수 있다”며, 지역구 선거에서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에 더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후보는 “자꾸 (민주당 2중대란) 프레임에 흔들려 좌고우면하다 보면 도리어 당의 정체성과 노선이 혼란스러워진다”며 “(선거 때) 과감한 연합정치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주 후보는 연합정치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더 강조했다. 조 후보는 “진보정치가 거악을 척결하기 위해 손을 잡자는 민주당의 반독재 민주화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당 2중대’에 서게 되는 것”이라며 “좋은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민주당이나 국민의힘하고도 언제든지 연대, 연합할 수 있는 정치적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김 후보는 ‘양당 체제’ 바깥의 진보세력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김 후보는 “자본이 아니라 노동 중심, 차별이 아니라 평등과 인권 중심이라는 가치에 동의하면 함께할 수 있다”며 “진보정치 연석회의가 ‘공동집권 전략위원회’ 수준까지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평등·연대·생태·평화를 실천해온 세계 진보정당의 역사적 경험과, 복지국가를 이룩한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를 21세기 한국에 맞게 창조적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이다.” 후보들은 한국형 사민주의와 생태·평화를 강조한 정의당의 이 강령에 모두 동의했다. 다만 ‘사민주의 정당이라는 기치를 더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견해와 ‘깃발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견해가 갈렸다.
이동영·조성주 후보는 더 전면적인 사민주의 구현에 나서야 한다고 봤다. 조성주 후보는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국의 진보정치가 비겁했다. 전세계 어디서나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다양성과 인권·자유를 증진시킨 현실 노선인데, 그 성과를 ‘개량’이라고 부정해왔다”고 말했다.
이정미 후보는 “사람들이 (정의당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사민주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제3정당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내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실행력 있는 리더십’을 강조했다. 정호진 후보 역시 “당헌·강령에 있는 노선이 불분명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문제는 우리의 강령을 실천하는 정치인들(의 태도)이 혼란스러웠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5명의 후보들은 당장 정의당의 첫 과제로, 노동자 파업 등을 이유로 사용자가 과도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관행을 막기 위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3조 개정안) 처리를 꼽았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라는 정체성, 거대 야당인 민주당을 견인하는 연합정치의 전략, 노동계·시민사회와의 연대에 이르기까지 진보정치의 고민을 두루 담아낼 기회라는 것이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