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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분단 뒤 첫 만남, 딱 3분…무슨 얘기 나눴을까?

등록 2022-05-04 10:59수정 2022-05-04 11:23

정치BAR_이제훈의 동서남북
통일부, 남북회담 사료 첫 공개
1948년 분단 이후 사상 첫 남북 당국 간 양자 접촉인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1차 접촉이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통일부 제공
1948년 분단 이후 사상 첫 남북 당국 간 양자 접촉인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1차 접촉이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통일부 제공

1948년 8월15일과 9월9일 각각 두 개의 분단정부를 세우고 ‘3년 전쟁’(1950년 6월25일~1953년 7월27일)을 치른 남과 북은 언제 처음으로 다시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합의’를 했을까?

1971년 8월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제1차 파견원 접촉은 남과 북이 당국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양자 접촉한 첫 사례다. 통일부가 4일 일반에 처음 공개한 남북회담 사료인 <남북회담사료집> 제2권에 그날 남과 북 대표의 아주 짧고 긴장된, 그러나 ‘역사적’인 대화가 담겨 있다.

남: 안녕하십니까?

북: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

남: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파견한 이창열과 윤여훈입니다

북: 앉아서 이야기 합시다

남: 앉으세요

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에서 나온 염종련입니다

남: 신임장 제시합니다

북: 이것이 우리 신임장입니다

남: 어느쪽이 주대표 선생이신가요? 오른쪽이 염 선생이시고 이쪽이 서 선생이신가요?

북: 제가 서성철이고 이쪽이 염종련입니다

남: 제가 윤여훈입니다

남: 제가 이창열입니다. 이분이 윤여훈입니다. 신임장을 제게 주시겠어요? 우리 대한적십자사 총재께서 지난 8월12일 귀회에 제의한 인도적 남북적십자사 회담에 대한 문서를 전달합니다.

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당신네 적십자 총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합니다. 이것이 편지 전문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전달합니다.

남: 알았습니다. 적십자에 오래 계셨습니까?

북: 조금 나갔습니다

남: 전 좀 오래 되었습니다. 이번에 어때요, 수해가 많이 안졌습니까?

북: 수해가 없었습니다

남: 아, 그러세요

북: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봅니다

남: 아, 그러세요

북: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봅니다

남: 예

북: 우리는 앞으로도 연락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종종 만나 봤으면 합니다

남: 예, 감사합니다. 또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북: 그만 합시다. 우리의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입니다. 앞으로도 이 명칭대로 정확히 써주기 바랍니다

남: 우리 정식명칭은 대한적십자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가 좋을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남: 안녕히 가십시오. 종종 뵙겠습니다.

북: 안녕히 가십시오.

1971년 8월20일 낮 12시1분부터 4분까지 3분이라는 짧은 순간에 휘몰아치듯 이뤄진 남과 북의 첫 당국 차원 공식 대화 기록이다.

남과 북의 파견원들은 만나자마자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서로 이름을 확인하고, (접촉대표임을 증명하는) 신임장을 주고받고, 한적 총재와 북적 중앙위원장의 서신을 서로 전달하고, 추가 접촉 의지를 확인하는 ‘임무’를 숨가쁘게 마치고는 “종종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주고받고 헤어진다.

이 역사적 만남은, “남북 가족찾기운동”을 협의할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며 “10월 안에 제네바에서 예비회담”을 하자는 최두선 한적 총재의 1971년 8월12일 제안에, 손성필 북적 중앙위원장이 이틀 뒤인 8월14일 “8월20일 12시에 우리 적십자회의 서신을 가진 2명의 파견원을 판문점에 보내려고 한다”고 화답해 성사됐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남과 북은 2년 남짓 꾸준히 만나 대화하고 협상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이른바 ‘조국통일 3대 원칙’으로 유명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1970년대 초반 적십자 파견원 접촉으로 시작해 남북 정상 특사 상호 방문까지 상승한 분단 이후 첫 남북 당국회담은,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 비밀 방문(1971년 7월9~11일)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1972년 5월 이전 베이징 방문 계획’ 발표(1971년 7월15일)라는 냉전 질서와 동북아 정세의 급변에 대응하려는 ‘상호 탐색전’의 성격이 짙었다.

남과 북은 적십자 파견원의 첫 접촉 이후 한달여 만인 1971년 9월29일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에서 판문점 남쪽 구역 ‘자유의 집’과 북쪽 구역 ‘판문각’에 각각 “회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를 잇는 “직통 왕복 전화”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북의 발표문엔 “회담 연락사무소”란 표현은 없고 “직통전화 설치”란 내용만 나온다) 분단과 전쟁으로 완전히 끊긴 남과 북의 소통 창구가 다시 마련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남북 직통전화의 시작이다.

판문점 남쪽 구역 ‘자유의 집’과 북쪽 구역 ‘판문각’에 각각 “회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를 잇는 “직통 왕복 전화”를 설치하기로 한 1971년 9월29일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 합의사항을 각자 정리해 서명한 문서. 통일부 제공
판문점 남쪽 구역 ‘자유의 집’과 북쪽 구역 ‘판문각’에 각각 “회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를 잇는 “직통 왕복 전화”를 설치하기로 한 1971년 9월29일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 합의사항을 각자 정리해 서명한 문서. 통일부 제공

그런데 당시 남과 북은 이 역사적 합의를 문서로 정리해 공동 서명하고 함께 발표하지는 못했다. “대한적십자사 예비회담 수석대표 김연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대표단 단장 김태희” 명의로 각자 작성한 문서에 서명하고 각자 발표하는 방식을 취했다. 마주 앉아 대화·협상해 합의에 이르렀지만, 분단과 전쟁에 따른 불신, 상대방의 정치체제와 존재를 부인하는 ‘체제 경쟁’ 따위의 영향이다.

남과 북 당국의 회담 대표가 하나의 문서에 함께 이름을 올린 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처음이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국호가 명시된 양자 합의문서는 1991년 12월13일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처음이다.

이런 여러 아쉬움과 ‘한계’에도 1970년대 초반 남북 적십자 사이의 대화와 협상은 다섯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의 첫 밑돌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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