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시작된 서울시 참여예산제가 올해로 10년을 맞이했다. 2011년 지방재정법 개정으로 주민참여예산제 실시가 의무화됐고, 이듬해 서울시도 시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를 제정해 참여예산제도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초기엔 500억원 규모로 시민 제안 사업만을 숙의하다 2019년부터는 행정 주도로 편성한 기존 사업까지 숙의 대상에 포함했다. 2019년에 2천억원, 2020년에 6천억원 배정에 이어 올해는 숙의예산 대상 금액으로 1조원이 편성됐다. 서울시 전체 예산(약 40조)의 약 2.5%다.
서울시는 예산학교 교육과정(6시간)을 수료한 시민 중 신청자를 대상으로 매년 1월, 성별·연령별·지역(자치구)별 균형을 맞춰 시민위원을 무작위 추첨한다. 청소년, 장애인, 다문화가정 등엔 우선권을 부여한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총 2729명의 시민위원이 활동했다. 올해는 지원자 1011명 중 필자를 포함해 344명이 선발됐다. 참여자 연령대는 1941년생부터 2005년생까지 다양하다. 복지, 문화, 교육 등 서울 시정 전 분야를 포괄하는 18개 분과가 구성됐고, 각 분과에 소속된 위원들은 올해 1년간 2022년도 서울시의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민위원들의 의견은 예산 편성 최종 권한을 가진 시의회로 전달되어 2022년도 예산 편성에 방향성을 제시한다.
2019년 8월의 마지막 날, 시민참여예산 한마당 총회가 열렸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에는 시민참여예산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참여예산 활동을 돌아보고 분과별 내용을 공유하는 행사가 매년 열렸다. ‘나는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라는 질문의 투표 결과가 화면에 담겼다. 서울시 제공
“이게 숙의인가요? 결정 내리기 전에 사업 설명도 듣고 다른 위원들과 의견도 나눌 줄 알았어요. 앞으로 숙의할 사업을 공무원들이 뽑아 와서 우리는 손만 들고 결정하다니요. 우리를 거수기로만 생각하는 겁니까?”
시민건강분과 숙의예산민관협의회 첫 회의가 진행된 지난 4월15일.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한 시민위원이 진행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위원들도 나서 거들었다.
“이게 시의회에 그대로 전달되면 ‘시민이 요구하는 건 이런 거다’라는 식으로 왜곡될 수 있거든요. 예산을 더 잘 쓰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여기에 온 거지 모르는 내용 가지고 거수하려고 온 건 아니에요.”
담당 공무원은 “효율적인 회의 진행을 위해 제안한 것”이라며 “자유롭게 논의해서 의사 결정 과정이나 사업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청 시민건강국이 관리하는 사업 300개를 모두 논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 결정 방식에 대한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한 시민위원이 한가지 대안을 냈다.
“우리가 300개가 넘는 사업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으니 시민건강국 소속 5개 부서에서 시민 의견이 필요한 사업을 각각 4∼5개씩 추려 오면 어떨까요. 다음 시간에 사업 담당자들이 개요를 설명하고, 그중에서 논의할 사업 몇가지를 뽑아보죠.”
1차 회의가 열리고 한달 뒤, 서울시청 시민건강국 소속 20명의 사업 담당 공무원들이 회의장에 참석했다. 각자 사업 개요를 설명하고,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서울시청 내 가장 바쁜 부서임에도 각 사업 담당자들은 충분한 자료와 설명을 제공했다. 그래서인지 예정 시간을 한참 넘긴 저녁 9시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숙의예산민관협의회 문화분과 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시 제공
시민들 힘 필요한 사업 홍보하는 공무원도
사업 추진에 시민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 공무원도 있었다. ‘학생 및 아동 치과 주치의’ 사업 담당자는 “아동기 치아 건강을 유지하는 사업이 정말 중요한데요, 작년 코로나 상황으로 진행이 어려웠습니다. 작년에 남은 예산을 올해 이월시켜 사용했는데, 예산 편성 특성상 올해 예산을 기준으로 내년도 예산이 정해지다 보니 예산 확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위원님들께서 사업 필요성에 공감해주시고 증액을 위해 안건으로 상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비록 시민위원 21명의 투표 결과 1표 차이로 논의 대상 사업으로 선정되진 않았지만, 많은 위원이 사업 취지에 공감했다.
논의가 활발했던 사업 중 하나는 ‘보건지소 확충 지원’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내년도 예산 계획으로 60억원가량을 산출했다. 담당자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보건환경이 더욱 중요해진 이때, 지역 거점별로 보건지소를 확대 설립한다면 주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치구별 보건소 한곳으로는 공공보건을 책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위원이 사업 취지엔 공감했지만, 예산 운영 계획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했다.
“교재비로 200만원을 배정했네요. 지속사업이라 기존 매뉴얼이 있을 텐데 굳이 새 교재를 만들 필요가 있나요?”
“보건지소 1개소 확충에 7억원을 신청하는데, 설명이 너무 부실해요. 안에 인건비, 공사비, 부지 사용료 등이 얼마인지 명기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큰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데, 증액이 필요한지 감액이 필요한지 어떻게 논의하나요?”
“보통 어르신들이 보건지소를 많이 이용하는데, 홍보물 같은 거 글씨도 작고 안 보여요. 어르신 맞춤형 홍보 방식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해요.”
이날은 서울시 예산담당관도 참여해 더욱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한 예산담당 팀장은 “보건지소 신설이 신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운영지원비 7천만원 산출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여요. 그리고 한 위원님이 지적하셨듯이 홍보 및 교육 물품비 항목이 추가됐네요. 저희가 예산 편성을 하다 보면 당초에 없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거든요. 계속 사업임에도 교재비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네요”라고 말했다.
긴 논의 끝에 ‘보건지소 확충 지원’ 사업은 △운영지원비를 7천만원에서 4천만원으로 감액 △교육 교재비 및 홍보비는 원안 유지로 결론지었다.
6월24일 시민건강분과 6차 미팅은 화상으로 진행됐다.
시민·공무원 적극 참여로 효능감 높아져
8차례 걸친 회의에도 출석률은 항상 60%를 웃돌았다. 시민건강분과 소속 30명의 시민위원 중 20명 정도는 꾸준히 참석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는 경우도 많았는데, 위원들은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만 있다면 회의 시간을 더 가져도 좋다고 했다.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석달 동안 시민위원들은 낮에 직장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마치고, 밤늦게까지 모여 1천만 서울시민의 건강 증진을 위한 더 나은 방법을 모색했다.
시민위원들의 회의 숙련도도 높아졌다. 공무원들이 준비한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고, 사전에 보충 자료를 요청해 사업 이해도를 높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정책 수요자로서 경험한 사례들을 공유하며 사업별 예산 배정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시민위원 활동이 처음이라는 위금숙 위원은 “처음엔 감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리 공부하고 논리적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고 숙의할 수 있는 환경이 잘 마련된다면 시민들도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양효정 위원도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해도 모두 경청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편하게 의견을 낼 수 있었다. 담당 공무원들이 자료를 충분히 제공해준 덕분에 공부도 많이 됐다. 이번 활동으로 참여 효능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2019년 9월 열린 서울시 정책박람회에서 시민숙의예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열렸다. 서울시 제공
참여예산제의 시작은 1989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시
참여예산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파리, 리스본, 헬싱키, 이스탄불 등 많은 나라의 수도, 주요 도시에서도 도입했다. 처음 시작은 1989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시에서였다. 외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거주지를 형성한 이 도시는 중앙집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했다. 하수처리시설이나 도로 등 기반시설마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노동당의 올리비우 두트라가 시장으로 당선된 뒤, 주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주민들과 토론을 시작했다. 이것이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포르투알레그리시에선 지역 주민, 시의회 대표, 예산담당 공무원들이 2월부터 12월까지 격주로 모여 지역에 필요한 정책을 고민하는 자리를 갖는다.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시 헤스칭가 지역에서 2019년 9월 열린 참여예산 회의.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시 누리집
2018년에 번역서 <포르투알레그리의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펴낸 최상한 한국행정연구원장은 “포르투알레그리시의 성공 비결은 단체장의 의지와 함께 주민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주민이 지역 현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덕분”이라며 “주민들이 숙의 경험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갖게 된다면 행정부, 의회를 견제하는 역할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열린 ‘서울 시민참여 포럼’에 기조발제로 참여한 이브 카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개발계획학 명예교수도 전세계 참여예산제 우수 사례를 비교해 △정치적 의지 △시민의 힘과 조직력 △시민에게 충분한 교육과 정보 제공 △참여예산에 높은 예산 배정 △교육을 잘 받은 담당 공무원의 역할을 참여예산제도의 성공 요소로 꼽았다. 2012년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조례 제정을 주도했던 서윤기 서울시 의원은 “처음 조례를 발의했을 때 다들 시민이 직접 예산을 편성할 역량이 없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하면서 “매년 시민 의견을 전달받는데, 오랜 숙의 과정을 거친 만큼 예산 편성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최인욱 서울시 시민숙의예산과 시민협력팀장도 “시민들이 예산과 관련된 토론을 과연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현장에서 일하며 숙의의 질이 높아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초기엔 예산을 자치구별로 25등분으로 나눠서 안배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진행이 어려웠는데, 이제는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 사업 내용을 보완하는 등 구체적이고 생생한 의견을 전한다. 공무원들도 익숙해져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 의견을 경청한다”며 업무 경험을 나눴다.
대표성 확보, 논의절차 보완, 시민역량 강화는 숙제
그러나 여전히 미흡한 점도 있다. 지난해 활동한 시민위원 28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복수응답 결과, 145명이 소요예산 산출을, 136명이 사업 내용 구체화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위원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153명,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절차 보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133명 있었다. 최인욱 팀장은 “숙의 과정에서 사업별 증액, 감액을 따지면서 금액 결정에만 집중하는 게 적절한지 고민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숙의를 진행한 건 올해가 세번째이기 때문에 앞으로 제도를 더 보완하겠다”고 했다.
대표성 문제도 제기됐다. 최상한 원장은 “300여명의 참여예산 위원들이 1천만 서울 인구의 의견을 대변하기 쉽지 않다. 사실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과 가장 밀접한 기초단체에서 시행하기 좋은 제도다. 공론화 과정을 촘촘히 설계해 건강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윤기 의원은 “대표성을 높이려면 우선 많은 시민이 참여예산제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참여 인원수도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회와 행정, 시민 간 서로의 권한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다. 지난 10년간 각 주체가 만난 적이 없는데, 서로의 이해를 높이는 자리도 마련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브 카반 교수는 “참여예산제는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결합체다. 정부와 시민 간 관계가 강화되면 좋은 거버넌스가 만들어지고, 민주주의도 고도화될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민주주의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참여예산제는 일상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실현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