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왼쪽)이 14일 새벽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제9차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 결과 브리핑을 마친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내년도 최저임금 시급이 올해보다 1.5%(130원) 오른 8720원으로 결정됐다. 1988년 제도 도입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진 특수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낮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2.7%)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2.75%)의 인상률에도 한참 못 미치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앞으로 기본급뿐 아니라 수당 등이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들어가면 동결이나 삭감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14일 새벽에 끝난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 도중 근로자 위원 9명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노동계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했다. 2018년도(16.4%)와 2019년도(10.9%)까지만 해도 공약을 향해 가는 듯하더니, 2020년도(2.87%)에 고꾸라졌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경영계의 반발과 보수언론의 집요한 공격에 정부가 백기를 든 거나 다름없었다. 내년도 인상률도 코로나 위기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최저임금에 대한 정부의 ‘속도 조절’ 기조가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정부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공익위원 안이 그대로 채택된 것을 봐도 그렇다.
물론 경제 사정을 도외시한 채 공약을 지키라거나 노동계 요구 수준에 맞추라고 하는 건 지나치다. 그러나 최저임금의 의미는 단순한 노사 간 합의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임금 수준에 대한 정책적 의지와 사회적 합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최저임금을 ‘포용 성장론’의 지렛대로 삼겠다고 한 건 문재인 정부 자신이었다.
공익위원들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0.1%와 소비자물가 상승률 0.4%, 생계비 개선분 1.0%를 합산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놨다. 그러나 이번 결정 과정에서 경제위기와 함께 저임금 노동자의 고용 유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고도 밝혔다. 결국 일자리와 최저임금 인상을 교환했다는 뜻이다. 그런 취지라도 살리려면 경영계의 고용 유지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최저임금 대상이 집중된 영세사업장 안에서 자영업자와 노동자가 ‘을과 을’로 대면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이런 식의 제로섬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최저 생계비 수준에 대한 가이드라일 뿐이다. 자영업 부진의 구조적 원인을 풀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을 높이는 종합적인 정책 대안을 정부가 내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