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전 디비(DB)그룹(옛 동부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23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체포돼 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하고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준기 전 디비(DB)그룹(옛 동부그룹) 회장이 17일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재벌 총수가 자신의 막강한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 저항이 어려운 약자들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것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람을 가두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피의자가 처한 상황을 두루 살펴 법의 허용 범위 안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합리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에 대한 판결은 재벌 총수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형량을 줄여주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해온 사법부의 오랜 행태가 되풀이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법원도 김 전 회장의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그의 성폭력은 반복적이었다. 법원의 표현대로 상대가 “내부 사정을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를 무기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김 전 회장은 미국에 2년 넘게 머물며 수사기관의 소환을 피해오다가, 여권 무효화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의 적색 수배에 이어 범죄인 인도 청구까지 이뤄진 뒤에야 귀국했다.
우리 사회에는 성범죄에 ‘무관용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성범죄 양형 기준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 최근 ‘엔(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미성년 피의자의 신상까지 공개됐다. 그런데도 법원은 김 전 회장에 대해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거나 “75살의 나이를 갖고 있다”는 점을 양형 사유에 포함했다. 법원이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2심에서는 더 엄정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