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고성·속초 일대에 산불이 이어지던 5일 속초 교동 인근에서 소방대원들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속초/연합뉴스
주말을 지나면서 ‘역대급 재난’이라 불린 동해안 산불은 완전 진화됐다. 안타까운 사고지만, 산불 규모에 비하면 진압과 구조작업이 그나마 잘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본다. 우리 사회 위기대응능력이 한단계 높아진 것 같아 다행스럽다.
거센 바람에 산불이 삽시간에 번졌음에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던 건, 현장에서 목숨 걸고 화마와 싸운 소방대원과 수많은 시민,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에 그을리고 손바닥이 터져나가는데도 밤새워 호스를 놓지 않고 주요 거점을 지킨 소방대원들 모습을 담은 사진은 온 국민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또 끝까지 현장에 남아 학생과 환자의 안전한 대피를 위해 책임을 다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소식 하나하나가 감동이고,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속초의 보광사는 주변의 유명한 솔밭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대웅전과 요사채 등 사찰 건물은 무사했다. 밤새워 불길과 싸운 소방대원들의 사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막은 건 소방대원들뿐이 아니다. 속초의료원 김진백 원장과 직원들은 한밤중에 의료원 앞까지 다가선 불길 속에서도 침착하게 환자와 가족 145명을 인근 대피소로 무사히 이동시켰다. 속초시 교동 강원진로교육원엔 중학생 179명이 연수 중이었는데, 교사와 교육원 직원들의 노력으로 모두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불길 속에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했던 건 아니다. 위기상황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맡은 일을 책임지고 수행한 게 대형 참사를 막은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세월호를 비롯한 사고현장에서 인솔자나 관리자의 무책임한 행동이 엄청난 인명 피해로 이어지는 걸 숱하게 봐왔다. 이번 동해안 산불에선 달랐다.
다시, 재난 앞에서도 정치공세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을 떠올린다. 산불을 조기에 진화할 수 있었던 데엔, 한밤중에 전국 소방 인력과 장비를 강원도로 총동원한 소방청의 기민한 대응이 큰 몫을 했다. 5일 청와대 게시판엔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해달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이틀 만에 10만명 넘는 시민들이 동참했다. 그런데 몇년째 국회에 계류 중인 관련 법은 연내 입법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고 한다.
제도 개선엔 소극적이면서 산불을 정치공세로 활용하는 덴 탁월한 게 우리 정치권의 현주소다.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에 이어, 이번엔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촛불 정부인 줄 알았는데 산불 정부”라고 조롱하는 글을 게시했다. 시민들은 재난에 성숙하게 대응하는데, 정작 제 역할을 못하는 건 정치권뿐인 듯싶다.
국가 재난에도 정치적 공격에만 몰두하는 건 보기 안쓰럽다. 누구든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면,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안전을 지키는 첩경일 것이다. 동해안 산불 재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