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재판거래’ 의혹 속 5년 만에 확정
“반인도적 불법행위, 한-일 협정 제외”
정부, 한-일 관계 슬기롭게 대처해야
“반인도적 불법행위, 한-일 협정 제외”
정부, 한-일 관계 슬기롭게 대처해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30일 이춘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의 재상고를 기각하고 원고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8개월 만이고 재상고심에 올라온 지 5년여 만이다. 그동안 다른 원고들은 이미 세상을 떴고 94살의 이춘식씨만 생존해 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더구나 징용 피해자들의 강제노역 대가를 법관 해외파견 자리와 맞바꿔 ‘재판거래’ 대상으로 삼는 바람에 지체됐다니 낯 뜨거운 일이다. 사법농단 당사자들이 고인들 영령 앞에 석고대죄 해도 모자랄 것이다.
이번 판결은 사법농단에 의한 오랜 소송 지체를 해소하고 일제강점기 피해를 뒤늦게나마 구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일 청구권협정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간 외교적 분쟁 가능성도 큰 만큼 정부가 적절한 대처에 나서야 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정부가 맺은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부의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서 빚어진 위자료 청구권이란 이유에서다. 즉 청구권협정문이나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이 없고, 한-일 간 협상 과정에서도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한 이상 불법행위에 대한 피해는 한-일 협정 대상이 아니란 취지다. 협상 과정에서 12억2천만달러를 요구했으나 3억달러(무상)만 받았는데, 강제동원 위자료까지 포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도 덧붙였다. 일제 식민지배와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는 우리 헌법의 가치체계에 비추어 당연한 판결이다.
‘박근혜 청와대’가 한-일 관계에 미칠 파장 운운하며 2012년 당시 대법원의 재판 결과를 뒤집으려 했고, 외교부·법무부 등 정부부처는 물론 대법원 수뇌부까지 이에 부화뇌동해 확정판결을 미뤄온 사실은 이미 검찰 수사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사건이 사법농단의 상징적 사례가 된 만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주도한 재판거래의 전모가 투명하게 밝혀져야 이번 판결의 의미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당분간 한-일 관계가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한-일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저부터 뒤엎는 것이다.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정부의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한 국면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정부의 대응방안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한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일각에서 ‘양승태 대법원’ 재판 지연의 불가피성을 부각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 일본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당사국인 한국의 동의 없이는 법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3권 분립의 민주국가에서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이 존중돼야 함은 상식이다. 일본 역시 민주정부라면 자중해야 마땅하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오른쪽)씨가 소감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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