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여론에 대해 정부가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누진제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갈수록 커지고 여야 의원들이 앞다퉈 개편 방안을 내놓자, 산업통상자원부가 9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엉뚱하다 못해 국민을 무시하는 게 아니냐는 불쾌감까지 든다.
채희봉 에너지자원실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누진제 개편 요구를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는 “전력 수요를 낮추려면 누진제가 필요하다. 여름철까지 전력을 많이 쓰게 하려면 발전소를 또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6단계(누진 구간) 가구 비중은 4%에 불과하다. 누진제를 개편하면 부자 감세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 4시간 사용하면 월 요금이 1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온라인에는 “에어컨 좀 틀었다고 상위 1% 부자가 되냐” “장관실도 하루 3시간만 에어컨 틀고 지내봐라” 등 비판 댓글이 줄을 이었다. 산업부가 누진제 논란의 본질을 비켜간 채 매년 되풀이해온 ‘흘러간 노래’를 또다시 틀었기 때문이다. 누진제 개편 요구는 전기를 더 쓰자는 것도, 발전소를 더 짓자는 것도, 더욱이 부자 감세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행 누진제가 그간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하지 않았으니 현실에 맞게 개편하자는 취지다. 전력 사용량은 해마다 늘어나는데 누진 구간과 누진율은 10년 동안 그대로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누진제가 반드시 저소득층에 유리하고 고소득층에 불리한 것도 아니게 됐다. 또 산업용과 상업용은 제외하고 가정용에만 누진제를 적용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으니 고치자는 요구다. 전기를 가장 적게 쓰는 가정이 전기료 부담은 가장 큰 모순은 바로잡을 일이다.
이 정도로 국민의 불만이 쏟아지면 하다못해 태스크포스(TF)라도 꾸려 원인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아보는 노력을 하는 게 정부의 바른 자세다. 그런데도 산업부는 시간만 끌면 올여름도 그냥 지나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큰 오산이다. 산업부는 지금이라도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국민 의견을 전향적으로 수렴하고 국회와도 적극적으로 협의해 합리적인 개편 방안을 내놔야 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서울 남대문시장의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들이 촘촘히 설치돼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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