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인 정부가 정작 교과서의 내용을 채울 집필진 구성에서는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4일 집필진 구성에 대해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대표 집필자 6명 중 2명의 이름만 밝혔다. 상고·고대·고려·조선·근대·현대사 등 시대별로 대표 집필자를 두는데, 상고사와 고대사를 담당할 두 명만 겨우 섭외가 된 모양이다. 이럴 거면서 왜 그리 국정화를 서둘러 확정지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두 명의 대표 집필자 중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고대사)만 나왔고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상고사)는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이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회견장에 나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토록 완강하게 국정화를 밀어붙이더니 그 첫 단추를 끼우는 기자회견부터 어설프기 그지없다. 대표 집필자가 공식 기자회견장에도 나오지 못할 만큼 정당성을 잃은 교과서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강요하겠다는 건가.
나머지 4명의 대표 집필자는 “명망 높은 원로를 초빙 중”이라는데, 과연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 학자 가운데 당당히 나설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나서더라도 최 명예교수처럼 제자들의 반대에 부닥친다면 그 자체로 ‘명망 높은 원로’를 초빙하는 의미는 없어지는 셈이다. 근·현대사 부분은 뉴라이트 학자들이 손을 들고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계열의 학자들이 얼마나 명망이 높은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미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통해 학문적 밑천을 드러낸 바 있다.
정부는 투명성 문제에 대해서도 계속 말을 번복하며 궁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초 집필진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본인 동의가 없으면 공개할 수 없다’거나 ‘원고가 끝난 뒤 공개하겠다’는 식으로 물러섰다. 그 이유로 ‘집필진의 부담’ 운운하는데, 이름 걸고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떳떳하지 못한 집필진을 신뢰할 수는 없다. 또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교과서 초안이 나오는 대로 단원별로 인터넷에 올려 공개 검증을 받겠다’고 하더니 하루 만에 국사편찬위는 ‘집필진과 상의해봐야 한다’고 다른 말을 했다.
집필진과 집필 과정의 불투명성은 ‘국정 교과서는 결국 정부가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는 의구심을 뒷받침할 뿐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신뢰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 국민이 동의하는 교과서를 만든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부당한 국정화를 억지로 추진하다 보니 그 과정도 문제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