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여야 합의로 문구 수정을 거쳐 정부로 이송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6일 “(종전 국회법 개정안에서) 딱 한 글자 고쳤던데 우리 입장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이 과연 정상적인 판단 능력과 이성을 갖고 있느냐는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새 국회법 개정안은 이례적으로 국회의장까지 나서 위헌 문제 등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과 의구심을 다독인 것인 만큼 박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와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박 대통령에게는 국민의 시선이나 정치적 예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고집과 독선에다, 정치적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오기만이 넘쳐난다. 도대체 메르스 사태로 무능과 무책임의 완결판을 보여준 박근혜 정부가 거부권을 들먹일 용기가 있다는 것부터 놀랍다. 한마디로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는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입법부와 청와대의 전면전을 뜻한다. 당장 국회법 개정안을 정부로 이송하면서 “위헌 소지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선언했던 정의화 국회의장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중재안을 만들며 동분서주했던 정 의장에게 박 대통령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입법부 수장의 뺨을 때릴 태세다. 거부권 행사는 박 대통령이 입만 열면 외치는 민생 살리기도 빈말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여야가 국회의장 중재안에 합의한 것은 국회와 청와대가 불필요한 공방을 자제하고 민생에 전념하자는 뜻도 담겨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엉뚱한 오기를 부릴 경우 국정운영에 대한 야당의 협조는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애먼 국회법을 갖고 트집을 잡느라 그나마도 엉망인 국가운영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청와대가 거부권 행사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눈엣가시 같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비박 지도부’를 손보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벌써부터 친박계 의원들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유 원내대표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을 절대다수로 통과시켜놓고 이제 와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 친박계 의원들도 우습기 짝이 없지만, 새누리당 내부의 권력다툼을 위해 집권 여당의 편싸움을 부추기겠다는 박 대통령의 발상은 더욱 놀랍다. 상식과 이성을 내팽개친 채 ‘막가는 대통령’의 모습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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