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와 관련한 정홍원 국무총리의 28일 대국민 담화는 담화 발표의 주체도, 내용도 모두 잘못됐다. 시국의 엉킨 실타래의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지 총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하늘 높은 구름 위에 머물며 애꿎은 총리를 시켜 자신의 뜻을 에둘러 전달했다. 정 총리는 대통령의 침묵에 쏟아지는 여론의 비판을 막으려는 ‘방탄 총리’, 대통령의 말을 대신 읽은 ‘대독 총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담화의 형식도 문제지만 내용은 더욱 문제투성이다. 정직하지 못한 시국 인식, 모든 것을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논리의 비약과 자기합리화로 가득 차 있다. 우선 국정원 사건을 둘러싼 소용돌이를 ‘혼란과 대립’으로 규정하고 이를 ‘경제살리기 걸림돌’로 상정한 것부터가 엉뚱하다. 지금의 혼란상은 박근혜 정부가 국정원이 저지른 국기문란 행위의 실상을 자꾸만 호도하고, 진상 규명을 막고, 국정원의 철저한 개혁을 외면한 데서 출발했다.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해놓고 이제 와서 원인과 결과를 마구 뒤섞어서 국민을 속이는 논리다. 경제살리기가 지지부진한 것도 정치권의 싸움 등 남의 탓을 할 게 아니라, 여권 안에서까지 질타를 받고 있는 경제팀의 무능을 탓할 일이다.
정 총리가 ‘철저하고 공정한 수사’를 강조하며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한 대목은 더욱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여주지청장 등 ‘눈엣가시’들을 제거하고 남은 자리는 ‘국정원장의 선거법 혐의가 무죄임을 확신한다’는 따위의 말을 서슴없이 하는 인사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검찰의 현주소다. 국정원과 업무상 깊은 협력관계를 맺어온 공안통이 새 수사팀장을 맡은 것도 사건 수사가 어디로 흐를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믿고 기다려 달라는 말을 태연히 하는 후안무치함이 신기할 정도다.
정 총리는 “대통령께서는 처음부터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애초 ‘국정원에서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댓글 정도가 아니라 국정원이 퍼나른 트위터 글의 어마어마한 내용과 규모가 밝혀진 마당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상황 인식 자체에 큰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 총리가 “각종 비리와 도덕적 해이 등 고질적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 개선 대책”을 언급한 것을 놓고 대대적인 사정바람을 점치는 분석도 나온다. 사정도 좋고 비리 척결도 좋지만, 진정 척결하고 바로잡아야 할 최대 비리는 국정원과 군의 국기문란 행위다. 이런 행위는 어물쩍 넘기려고 하면서 사정바람을 몰고 온다면 이는 국민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술책에 불과할 뿐이다.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 담화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아집과 독선을 확실히 보여줬다. 그것은 국민이 뭐라 하든 귀 막고 입 닫고 자기 길을 가겠다는 고집불통의 자세다. 나라의 장래가 참으로 암담하다.
‘대독 담화’로 ‘댓글 정국’ 못 덮는다 [#185 성한용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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