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초라해진 씨름판이
어쩌면 한국 재벌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한국 재벌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언제였는지, 감감하다. 중·고등학생 시절이던 1980년대였을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상대편도 기억나지 않는다. ‘김칠규’라는 선수 이름과, 그 마지막 한 장면만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씨름 선수치고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가 훨씬 큰 덩치의 상대를 뒤집기 한판으로 깨끗하게 제압하던 모습이란, 아!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아래로 잡아끄는 중력을 거부하겠다는 듯, 상대의 몸 밑으로 파고들어가, 순식간에 등을 활처럼 뒤로 휘며, 거구를 고등어자반처럼 뒤집어놓는 걸,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직접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신기했다. 설 연휴 마지막날, 민속씨름계가 극도의 침체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흘려들으면서 그때 그 장면이 또다시 떠올랐다.
팥죽처럼 들끓었던 ‘재벌 빵집’ 소동 장면까지 여기에 얽혀들며, 한때 8개에 달했던 프로팀이 ‘현대삼호중공업’ 하나만 달랑 남아 있을 정도로 초라해진 씨름판이 어쩌면 한국의 재벌, 나아가 한국 경제 전반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날렵한 몸매에 창의적인 기술을 갖춘 ‘김칠규들’이 오직 힘으로 밀어붙이는 ‘기중기들’에 밀려 맥없이 주저앉았던 모습은, 재벌의 딸들이 동네 골목상권까지 죄다 쓸어가는 지금의 양태와 많이 닮은 듯해서였다.
김칠규들이 사라진 씨름판에선 관객들도 사라져 흥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급기야 기중기들 자신의 설 자리마저 같이 없어졌던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재벌의 왕성한 식욕이 한국 경제의 생태계 전반을 계속 파괴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면, 자신들 또한 근거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그 당연한 사정을 재벌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재벌 가문의 딸들 ‘일부’가 빵 사업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고 한다. 나머지들 모두가 그에 보조를 맞추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이른바 ‘재벌 문제’의 해결과는 좀 먼, 변죽의 일이지 싶다.
‘재벌 빵집’은 재벌 문제의 뿌리가 아님은 물론 줄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지일 뿐이라는 견해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었다. 재벌 빵집이 남김없이 모두 철수한다고 해도 재벌 가문이 기업의 알짜 사업을 아들딸들한테 교묘하게 빼돌리고, 중견·중소기업들에 약탈적 거래조건을 적용하고, 이들 기업에서 편법으로 기술을 탈취해 상생의 순환고리를 끊고, 경제의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그 줄기와 뿌리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예의 씨름판에 빗대자면, 빵집 진출이 거구 씨름꾼의 예능프로 출연이라면, 줄기의 문제는 씨름판의 규칙이 기중기들에 되레 유리하게 짜여 있고, 그 규칙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전자는 도덕의 문제이고 후자는 법과 제도의 문제일 터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마저도 재벌을 규제하는 법률을 추가로 만들겠다며 소매를 걷는 걸 보면, 법과 제도가 어지간히 미흡한 현실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가 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그 움직임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경계심을 풀 수 없는 건, 신규 잣대의 ‘마련’만큼이나 중요한 건 기존 잣대의 ‘적용’이라는 점에서다. 법과 제도의 미흡 못지않게 이미 갖춰져 있는 잣대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문제를 지금까지 키워왔다는 비판은, 매우 진부하지만, 또 매우 정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법부는 물론 공정위·금융위·국세청 같은 행정부 내 감독기관들 또한 그 비판의 화살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굳세어라 공정위, 깨어나라 금융위, 힘내거라 국세청’, 노래라도 불러야 할 판이다. 그 노래에 대한 응답 속에서 김칠규들이 부활하고, 동네 골목의 제과점이 튼실하게 자라 ‘빵집 재벌’로 커가는 역동성을 발휘하기를…. 김영배 경제부 금융팀장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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