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자 예상대로 야당이 일제히 반발하고 여당 안에서도 격렬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조처가 정치 도의와 여론수렴 등 여러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세종시 수정은 무엇보다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신뢰를 크게 훼손시켰다. 세종시 건설은 2005년 3월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토대로 공정의 4분의 1쯤 진행된 대형 국책사업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20차례 가까이 원안 추진을 공약했다. 그랬던 사업을 송두리째 뒤집었으니 정치적 신뢰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백번 양보해 정권에 따라 정책적 판단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약속 번복에 대한 통절한 사과와 국민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지난해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수정 죄송’ 뜻을 한 차례 밝힌 게 고작이다. 심지어 어제 정운찬 국무총리는 “어제에 발목이 사로잡혀 오늘을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까지 했다. 통절하게 사과해도 부족한 터에, 기왕의 국가적 합의를 이렇게 폄하해도 좋은지 의문이다.
수정안 도출 과정도 문제투성이다. 정부는 지난해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세종시 수정 찬반 인사를 두루 망라했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일부 민관합동위원은 원안 수정의 부당성을 역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제 발표를 보면 민관합동위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한나라당 차원에서 가동한 세종시특별위원회가 원안과 수정안을 포함한 복수안을 다양하게 내놓긴 했지만, 정부 최종안에 반영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정부가 어떤 사안을 놓고 국민여론을 수렴한다 해도 신뢰를 얻기 어렵다. 삼성그룹 5개 계열사의 세종시 투자 방침도 순수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건희 전 회장 사면과 연계된 거래 가능성에 대한 관측이 더욱 무성해질 따름이다.
혼란의 장기화마저 우려된다. 청와대와 친이명박계 한쪽에선 관련 법률 처리를 2월 임시국회보다는 4월, 아니면 지방선거 뒤로 늦추자는 속도조절론이 나온다. 여론을 설득한 다음에 반대세력을 압박하자는 계산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걸린 초대형 국책사업안을, 그때그때 결정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논의시점을 고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되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닌 상태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정말 무책임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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