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요청으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에 동참하기로 한 네덜란드 노광장비 기업 ASML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작업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8~10일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반도체 보조금 정책으로 인한 한국 업체들의 피해 우려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의 ‘안하무인’ 산업 정책으로 한국 경제의 생명줄인 반도체 산업이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다음달 윤석열 대통령 미국 국빈 방문이 확정된 뒤에야 정부가 뒤늦게 나선 것은 아닌가.
안 본부장은 미국의 기준이 “과도한 정보를 요청한다거나, 중국 비즈니스와 관련해 제한을 많이 건다거나, 초과 이윤 (환수 조항) 같은” 문제도 있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반도체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준을 내놓으면서, 기업의 영업 기밀에 해당할 수 있는 시설 공개 등을 요구하고, 초과 이익 환수 방침을 밝혔다. 보조금을 받으면 10년간 중국 내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것도 금지된다.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심각한 타격을 강요하는 조항이다.
미국은 이 정책을 통해 중국의 첨단기술 수준이 미국을 따라오지 못하게 압박하면서, 한편으로 그동안 이윤이 높은 금융 산업 등에 집중하며 약화된 미국 첨단 제조업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한다. 한국이나 대만 기업들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미국의 보조금 지급 기준을 맞추려다 보면, 영업 기밀과 핵심 기술이 고스란히 미국 기업들에 넘어가고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전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미국이 해도 너무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만 반도체 기업 티에스엠시(TSMC) 창업자 모리스 장은 “미국이 돈으로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전자 제조업에 끼어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순진한 것”이라고 비판해왔다.
반도체는 지난해 한국 수출의 18.8%(1292억달러)를 차지한 핵심 중의 핵심 산업이다. 미국이 불공정한 보조금 기준을 공개한 것은 2월28일인데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난해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한국산 전기차는 세제 혜택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받았다. 미 완성차업체 포드는 중국 배터리 제조 기업과 ‘기술 제휴’로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세우겠다는 꼼수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다음달 미국 국빈 방문의 화려한 팡파르만 기대할 게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미 정상외교는 동맹의 부실함만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걸린 반도체 산업에서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