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정부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국내 기업 돈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해법’이라며 6일 발표했다. 일본 가해 기업들의 배상 참여나 사과는 없다. 일본 외무상이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차가운 언급을 했을 뿐 ‘사과와 반성’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수십년 힘겨운 싸움과 그 결실인 대법원 판결 등을 모두 후퇴시킨 참담한 굴욕적인 ‘해법’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국내 기업들의 “자발적 기여”를 받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으로 지급하는 등의 방안을 발표했다. 일본은 이날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외무상 발언과 대한국 수출규제 해결을 위한 협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을 내놓았을 뿐이다.
‘배상 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마무리됐다’는 일본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완패 외교’다. ‘식민지배 불법성과 가해 기업의 배상’을 명시한 한국 대법원 판결은 무시되었다. 가해 기업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날 어떤 상응 조처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이번 ‘해법’을 두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은 모두 양보하고 일본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이런 방안이 “국력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이자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는 정부 궤변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불안한 안보 상황과 국제질서 급변 속에서 한·일의 협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은 엄연히 존재한다. 가해 기업의 사과 또는 배상 참여는 피해자를 비롯한 각계의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은 졸속 ‘해법’이 나온 데에는 윤 대통령의 역사적 책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한-일 관계 개선의 최대 걸림돌이자 ‘지난 정부가 악화시킨 사안’으로 규정해왔다. 그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방안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서둘러 매듭짓고, 일본과 미국을 잇따라 방문해 한·미·일 협력을 확대하려 한다. 미국은 이날 이례적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과 국무장관, 주한 미국대사가 각각 성명을 내 한국 정부 발표를 “역사적”이라며 환영했다. 한·미·일 결속을 강화해 중국에 맞선다는 미국의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인데, 윤 대통령은 한국의 원칙을 훼손하며 미-일 공조에만 몰두한다.
윤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한-일 과거사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퇴행이다. 1997년부터 25년 넘게 싸워온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한·일 시민사회의 노력을 짓밟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기금 참여는 있었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무시했다가 좌초한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보다도 훨씬 후퇴한 외교 참사다. 역사가 이번 합의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