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2020년 8월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성추행을 당한 여성 가운데 피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10%가 채 안 된다는 정부 차원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직접적인 물리력이 동반되지 않는 성폭력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현행 형법은 폭행 또는 협박 등 ‘가해자의 유형력 행사’를 강간죄와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으로 삼는다.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범죄를 재정의하는 정책적 노력이 절실하다.
<한겨레>는 7일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결과를 입수해 보도했다. 여성가족부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한국갤럽에 맡겨 지난해 8~10월 19살 이상 국민 1만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성추행 피해 경험이 있는 여성 가운데 피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비율(복수 응답)은 각각 2.7%, 7.1%에 그쳤다. ‘가해자의 속임’이 34.9%로 가장 많았고, ‘갑작스럽게 당함’(26.6%), ‘강요’(18.7%), ‘지위(권한) 이용’(16.2%) 등이 뒤를 이었다. 피해 경험자가 훨씬 적긴 하지만 강간(미수 포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요(41.1%)와 속임(34.3%)이 협박(30.1%)이나 폭행(23.0%)보다 더 많았다. 조사를 수행한 연구진은 ‘정책적 시사점’에서 “폭행·협박을 전제하고 있는 강간죄 구성요건의 변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런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성폭력상담소가 접수한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이 71.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이유로 여성단체들은 그동안 줄곧 강간죄 기준을 폭행이나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야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처벌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 국제 인권기구들도 수차례 강간죄 구성요건 변경을 한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영국·스웨덴·독일 등 여러 나라는 이미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의 구성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비동의 강간죄’ 검토 계획을 밝혔다가 법무부와 여당의 반대에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했다. ‘여성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언제까지 자초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