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지난 5월10일 국회 앞 도로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이 여성가족부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든 채 기습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행정안전부가 5일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조직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뼈대로 하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박홍근 원내대표 등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보고했다. 정부 부처에서 ‘여성’을 지우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다. ‘성 주류화’(모든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성평등 관점 반영) 전략을 적극 받아들이는 세계 흐름을 거스르는 퇴행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여가부는 정무장관 제2실(198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1998년)와 같은 과도기를 거쳐 2001년 1월 처음으로 독립 부처로 출범했다. 예산과 인력, 권한 등의 한계로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20여년간 ‘성평등 정책 컨트롤타워’로서 여성의 인권과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해왔다.
정부·여당은 복지부 내부에 여성·가족 정책을 담당할 조직(본부)을 신설할 예정이므로 여가부 기능은 유지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말장난에 가깝다. 성평등 정책이 ‘독립 부처’가 아닌 복지부라는 방대한 조직의 여러 업무 중 하나로 취급될 경우 정책 추진 동력이 현저하게 약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컨트롤타워의 부재가 가져올 정부 차원의 성평등 추진체계 위축이 걱정스럽다. 성평등 전담 기구로서 갖고 있던 독자적인 법률 제안권과 예산 편성권, 부처 간 정책 조율 기능이 사실상 사라지는데다, 여성 정책과 관련해 다른 부처의 협조를 얻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 160개 나라가 독립 부처 형태의 성평등 정책 전담 기구를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애써 외면해왔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으니 여가부의 역사적 소명이 끝났다는 식의 궤변을 폈다. 그러나 국제기구의 각종 ‘성 격차’ 통계는 한국의 성평등 추진체계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해마다 성별 임금 격차 등을 조사해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1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다.
여가부 폐지를 포함한 한국의 성평등 정책 방향은 이미 국내를 넘어선 이슈가 됐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에서 여가부 폐지 공약과 관련한 외신 기자의 질문이 나온 데 이어, 최근 방한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성평등 관련 발언을 나눴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지난 4월에는 전세계 115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여가부 폐지는 여성인권의 심각한 퇴행”이라며, 여가부 폐지 공약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여가부 폐지를 선거 전략으로 활용했다. 최근 부쩍 여가부 폐지에 속도를 내는 것도 낮아진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정략적인 행보라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얕은수’에 넘어갈 국민은 많지 않다. 당위성이라고는 찾기 힘든 여가부 폐지,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