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8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정상회의에 참가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정상회의 참가국 정상 만찬이 열리는 마드리드 왕궁에 도착하고 있다. 마드리드/연합뉴스
박민희 | 논설위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은 왜 나토(북대서양정상회의) 정상회의에 가지 않았을까. 일본 언론의 서울특파원에게 물었다. “참의원 선거도 다가오고 여러 상황이 엄중한데, 부인이 가지 않는 것을 언론에서도 당연히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총리 부인이 워낙 구설수에 오르는 행보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국빈방문도 아닌 안보 관련 정상회의 참석에 부인을 동반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웠고, 기시다 총리는 의제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나토 정상회의에 초대받은 첫 한국 대통령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주역으로 기록되고 싶었을 윤석열 대통령의 다자외교 무대 데뷔는 이제 김건희 여사의 ‘패션쇼 외교’, ‘비선 수행’ ‘B컷 사진’ 논란 등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나토 창립 7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의 “구조적 도전”을 명시하는 현장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4개국이 초대된 것의 의미, 그 득실은 무엇이며 한국은 어떻게 다음 행보를 준비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토론도 실종되어 버렸다.
윤 대통령은 억울할 것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홍보 역량 부족을 꾸짖거나, 야당이 부당한 공격을 하고 있다고 탓할지 모른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 직무수행 긍정 평가가 일제히 30%대로 곤두박질 친 것은 대다수의 국민이 윤 대통령의 순방 성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윤 대통령에게 외교란 무엇일까? 윤 대통령의 외교 노선은 한미동맹 강화, 한일관계 개선,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역할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한국이 처한 엄중한 현실을 깊이 고민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신중하게 외교를 해나가고 있다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전 정부를 ‘친중, 종북, 반일’로 공격하기 위해 반대편의 외교 노선을 선택했을 뿐 아닌가. 전 정부는 못한 외교를 자신은 속전속결로 해낼 수 있다는 태도는 가볍고 위태롭다.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 개선으로 업적을 보이려 한다. 한일관계를 빠르게 개선해, 한·미·일이 정치·군사·경제·국제질서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윤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의 기간 동안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오늘 회의를 계기로 한미일 협력이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요한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12일 아베 신조 전 총리 분향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며 발신한 메시지도 같은 맥락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6월28일(현지시간) 마드리드 왕궁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 내외 주최 갈라 만찬에서 펠리페 6세 국왕 부부와 기념촬영하고 있다. 나토정상회의 사무국 영상 캡쳐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일본에 특사단을 보내 ‘문재인 정부와는 다르다’는 의지를 보이면, 곧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취임하자마자 한일관계가 쉽게 풀려갈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과 관련해 압류된 일본 기업자산을 강제매각(현금화)하지 않을 방법을 한국 정부가 마련하지 않는다면 관계 개선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완강하다.
정부가 지난 4일부터 강제동원 피해 해법 마련을 위한 민관협의회를 가동해 피해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정부가 먼저 피해자들에게 배상한 뒤 일본 쪽이 참여하는 기금에서 변제를 받는 대위변제 해법을 논의중이다. ‘현금화’ 시한을 고려하면 시간을 계속 끌 일은 아니지만, 급해도 우리의 원칙과 역사적 의미를 훼손해서는 안된다. 일본 기업들의 사과와 배상 참여가 없다면, 피해자들도 국내 여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 쪽은 ‘한국 정부가 국내 여론을 설득할 수 있나’를 가장 관심있게 보고 있다고 한다. 한일 정부간 합의를 해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와 여론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더 큰 후폭풍만 밀려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폭락하고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큰소리만 치는 상황에서는, 일본도 협상에 나서기가 난감할 것이다.
결국 한일관계도, 외교도 국내 정치라는 뿌리와 분리될 수 없다. 일본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사망과 참의원 선거 개헌세력 압승으로 평화헌법의 핵심인 9조를 바꿔 자위대의 존립 근거를 명시하고 군비 증강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분명 우려스럽고, 한일관계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끈질기게 평화헌법을 지켜온 일본 시민들의 역량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다. 보수 온건 파벌인 고치카이를 이끌고 있고, 원폭을 경험한 히로시마를 지역구로 둔 기시다 총리의 본래 정치 노선은 경무장·경제 우선·아시아 이웃국가들과의 관계 중시·비핵이다. 시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분배를 늘리겠다는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 노선도 주목할 부분이다.
시장의 자유만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민생 드라이브는 뿌리 없이 공허하다. 한일 관계에서도 조급함을 버리고 왜 관계 개선을 하려하며, 한일의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지켜야할 선은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여론의 동의를 얻어나가는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전 정부가 ‘유죄’임을 보여주기 위한 외교, 자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수사와 사정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정치로는 내치도, 외교도 더욱 엉망이 될 것이다. 수사로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수사로 통치할 수는 없다.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