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짙은 여름 냄새가 진동한다. 흙과 풀 냄새가 도시를 뚫고 올라온다. 사진 배정한
[크리틱] 배정한 l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쿠키 냄새를 맡고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특정한 냄새에 자극받아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상황을 ‘프루스트 현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가. 내 친한 친구는 해 질 녘 도시의 거리를 걷다 고기 굽는 냄새를 맡게 되면 언제나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긴 시간에 풍화된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 아빠 손을 잡고 어느 골목의 돼지갈비집으로 향하던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된다고 한다.
지리학자이자 미학자인 이푸 투안은 눈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변해버린 자신의 고향에서 50년 전 냄새를 온전히 맡을 수 있었던 체험을 회상하며 “냄새는 시각적 이미지와 달리 과거를 복구시켜주는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시각이나 청각과 달리 후각은 환경의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주며 도시의 장소와 풍경을 지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냄새는 빛이나 소리보다 훨씬 강력한 공간 경험을 형성한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듯 도시의 냄새도 서로 다르다. 어느 도시 특유의 냄새는 곧 그 도시의 정체성이다. 긴 여정의 피로를 안고 고향 도시로 돌아오면 친숙하고 편안한 냄새가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다. 흥분과 긴장이 뒤범벅된 첫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공항 바깥으로 나왔을 때의 익숙한 냄새, 그 비릿하면서도 후덥지근한 공기 냄새가 안겨준 안도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감각들에 비해 후각은 늘 저급하고 하등한 감각으로 여겨져왔다. ‘나쁜’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덧붙이지 않더라도 ‘냄새가 난다’는 문장은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듬뿍 담고 있다. 냄새는 사회적 계급을 나누는 징표이기도 하다. “김 기사 그 양반,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절대 넘지 않아.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몸에 밴 냄새가 가난의 문신이자 빈민의 상징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냄새는 많은 사람이 밀집해 사는 도시에서 언제나 극복과 제거의 대상이었고, 근대 이후에는 도시의 위생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작용했다. 후각의 관점에서 근대 사회와 도시의 역사를 촘촘히 재해석한 알랭 코르뱅의 책 <악취와 향기>에 따르면, 도시의 냄새는 사회적 발산물의 총합이다. 인간의 체취와 분뇨, 부패 물질과 오물이 만들어내는 악취가 파리를 비롯한 18세기의 도시들을 뒤덮었다. 냄새와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산업혁명과 도시화, 연이은 전염병 유행을 겪으며 냄새에 훨씬 예민해졌다. 후각적 경계심은 신체 위생 개념을 낳았고, 공중위생 담론을 통해 냄새가 도시의 공적 관리 대상으로 편입됐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한 전략이 화학과 의학, 건축과 도시계획을 통해 총동원되기 시작했다. 근대 도시공학의 핵심 수단인 포장, 배수, 환기는 냄새와의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도로 포장은 곧 도시의 냄새를 우리 발밑에 깊숙이 봉인하고자 하는 집요한 기획이었다. 위생 도시는 냄새가 삭제된 무취 도시의 동의어였다. 정교하게 계획되고 치밀하게 관리되는 요즘 도시 대부분은 후각의 풍성한 향연을 잃고 하향 평준화되었다.
다채로운 냄새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도시의 풍요로운 배경이다. 후각을 상실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빈곤해지듯, 후각적 침묵에 빠진 도시에는 사람 사는 맛이 없다. 감각하고 기억하는 재미가 없다. 잠시 동네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유월에 접어든 공원, 결코 제거되지 않는 짙은 여름 냄새가 진동한다. 안온하고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고 막막하기까지 한, 흙과 풀 냄새가 도시를 뚫고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