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우리를 지배하고 수탈한 일본과도, 한국전쟁에서 교전 상대국의 하나였던 중국과도 가끔은 티격대기도 하지만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북한과는 왜 그럴 수 없는가. 우리가 북한을 한갓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물론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고 있는 헌법상 영토조항의 삭제와 같은 결단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김명인ㅣ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나는 지난해 말 미국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이성과 양식에 따라 바이든의 당선을 바라느냐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대한 한가닥 기대를 위해 트럼프의 재선을 바라느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을 했었다. 비록 하노이 회담의 충격적 결렬 이후로 냉각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할지라도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의 기억이 아직 선연한 이 시점에서 남북, 북-미 간에 지난 70여년간의 적대체제를 불가역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긴절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려한 것과는 달리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시절의 전략적 인내주의에 머물지 않고 트럼프-김정은의 싱가포르 선언을 존중한다고 언명하는 등 북-미 간 대화에 나름의 의지를 보인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이 왜 긴요하고 간절한 것인가는 우리가 지난 70여년 동안 치러온 정치, 사회, 경제적 차원의 막대한 분단비용을 생각해본다면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로만 한정한다 하더라도 저성장 단계에 들어선 현 세계경제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의 탐색과 개발이 시급한 현재, 이를테면 유라시아 철도망 구축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같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경제 사회적 교류의 본격화가 가져올 기대이익만으로도 그 긍정적 효과는 막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도 북한은 더 이상 냉전시대와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극동전진기지가 아니고 탈냉전시대에 국가존립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로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경제제재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사활을 건 목표라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 기존의 낡은 관성으로 북한을 동북아시아 관리를 위한 꽃놀이패처럼 이용해서 얻는 이득보다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기왕의 영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결코 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냉정히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무엇보다 간절하고 딱한 것은 북한의 처지이다. 북한의 2020년도 국내총생산은 35조3천억원으로 남한의 1919조원에 비해 54분의 1에 불과하며 1인당 국민소득은 141만원으로 남한의 3744만원에 비해 27분의 1에 불과하다. 70년대 중반 이후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북한은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와 미국 주도의 국제 경제제재의 지속으로 인해 하락을 거듭하여 지금처럼 참담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런 그들이 군사력 유지에 국력을 쏟고 핵개발을 하는 것은 제재와 고립 앞에서 농성형의 병영국가체제의 유지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극악한 사정에 처한 북한으로서도 평화체제 구축 외엔 어떤 해법도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최근 북한이 노동당 규약 개정을 통해 남한혁명통일론, 즉 이른바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한 것은 바로 그 명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한-미 회담에서 한·미가 ‘남북 대화와 관여, 협력에 대한 지지’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제공’ ‘남북 이산가족 상봉 촉진’ 등 남북한의 자율적 교류에 대한 일정한 합의에 도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이제부터라도 더 적극적인 대북 화해 협력 조치들을 재개해야 할 것인데, 남북, 북-미 간에 일정한 신뢰의 회복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무기한 연기를 동력으로 삼아 이산가족 상봉 프로세스의 재개, 금강산 등 남한 국민의 북한 관광 재개, 각종 인도적 지원의 전면적 재개는 물론 무엇보다 개성공단의 재가동과 남북 철도 연결, 북한 경제특구에 대한 투자 실행 등을 과감하고 선제적으로 실천해나가야 하며, 이에 대한 어떤 외부적 간섭이나 제약도 과감히 무릅쓰는 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정에서 민주적 개혁과 불평등 해소를 위한 기득권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제 남은 임기 동안 남북문제만이라도 좀 더 과감한 행보를 통해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우리 구성원들의 사회적 합의와 지지도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인식의 대대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남북 간의 체제 비교나 경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야 한다. 북한 정권이 남북 분단 초기에 상대적으로 더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비극과 북한 사회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고, 그 사회를 더 이상 바람직한 사회모델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으며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넘는 동경은 한갓 몽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둘째,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가 하나의 국가체제로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자율성과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이제 삼가야 한다. 북한을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마치 일개 조폭집단을 대하듯이 함부로 비하하거나 능멸하고 그 인위적 붕괴를 기대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기존의 완고한 농성체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며 대화의 문을 봉쇄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셋째, 이와 더불어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상은 더 이상 ‘통일’이 아니라 상호 국가적 독자성을 지닌 상태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통일이라면 더 바람직하겠지만 우파건 좌파건 간에 통일이 절대선이라는 인식은 이제 낡았다. 중요한 것은 같은 민족이라는 특수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상호 다른 사회체제를 선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질적 역사를 경험해온 서로 다른 국가와 국민으로서 더 이상 적대하지 않고 호혜적인 협력이 가능한 선한 이웃 국가로서 평화적 선린관계를 마련하는 것이 현 단계에선 최선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야말로 절대선이다. 우리는 36년간 우리를 지배하고 수탈한 일본과도, 한국전쟁에서 교전 상대국의 하나였던 중국과도 가끔은 티격대기도 하지만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북한과는 왜 그럴 수 없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북한을 한갓 반국가단체로 간주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물론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고 있는 헌법상 영토조항의 삭제와 같은 결단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모색과 실천은 이와 같이 열정과 냉정의 황금비율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