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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오염된 말들의 지뢰밭

등록 2021-06-01 17:59수정 2021-10-15 11:22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극성팬을 일컫는 훌리건. 유럽 축구에서 경기장에 훌리건이 난입해도 중계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소란을 일으켜 효능감을 얻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진은 2016년 6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러시아와 잉글랜드의 경기가 끝난 뒤 양국 축구팬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 마르세유/AP 연합뉴스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극성팬을 일컫는 훌리건. 유럽 축구에서 경기장에 훌리건이 난입해도 중계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소란을 일으켜 효능감을 얻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진은 2016년 6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러시아와 잉글랜드의 경기가 끝난 뒤 양국 축구팬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 마르세유/AP 연합뉴스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언론학 박사)

차별과 혐오로 오염된 말들이 인터넷 공간을 우주 쓰레기처럼 떠돌고 있다. 말로 하는 활동인 언론은 무의식중에 쓴 단어 하나에 혹여 누가 상처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까치발 들고 살금살금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12주기인 지난 23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날 오후 <한겨레> 온라인으로 배포된 두 기사의 표현이 일부 소셜미디어 사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됐다. 집값 급등이 세계 공통의 고민임을 지적한 경제 기사의 주 제목 “‘중력 거스르는’ 세계 집값, 한국은 거품 우려 더 크다는데…”와 최근의 비트코인 가격 하락을 다룬 기사의 소제목 “비트코인 80% 넘는 ‘자유낙하’ 역대 ‘4차례’”가 그것이었다. ‘중력’은 이른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일을 ‘중력절’이라 부르며 조롱하는 용어이고, ‘자유낙하’도 그의 마지막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하필 서거일에 이런 제목을 다는 한겨레의 의도가 무어냐고 의심하거나, 불쾌감을 토로하는 말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쌓여갔다.

기사가 나간 지 한시간 정도 지나 한겨레는 문제가 생긴 걸 눈치챘다. 일요일이었지만 국장단은 온-오프라인으로 대응 방안을 논의해 실행했다. 먼저, 문제를 제기한 소셜미디어 이용자에게 ‘한겨레 트윗지기’ 이름으로 ‘중력’이란 말이 <시엔엔(CNN) 비즈니스>의 기사를 번역해서 나온 것임을 설명했다. 그 외신 기사는 “오클랜드에서 상하이, 뮌헨, 마이애미까지 주택 가격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 같다” (From Auckland to Shanghai, Munich and Miami, house price appear to be defying gravity)고 되어 있었다. 아울러 아직 발행 전인 종이신문 기사에서 ‘중력’이나 ‘자유낙하’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또 온라인 기사의 ‘자유낙하’라는 표현도 ‘급락’으로 수정했다. 비트코인 가격의 흐름을 보여주는 온라인 차트의 제목이 ‘프리폴’(Free fall)이어서 그걸 참고해서 단 제목이었다지만, 굳이 안 써도 되는 단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중력’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는 “원문이 그리돼 있고, 다른 기사를 쓸 때도 흔히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인데다 이미 온라인에 배포된 기사의 제목을 다음에 수정할 경우, 오히려 이 제목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의견이 우세했”다는 것이 편집국의 설명이다.

한겨레 편집국이 논란이 된 표현을 나중에라도 발견해 문제를 제기한 이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수정한 것은 비상대응 매뉴얼에 따른 대처였다. 이 기사로 누군가를 조롱하려 했다거나, 심지어 취재 기자가 일베 아니냐는 공격은 한겨레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조롱이나 모욕의 언어에 대해 좀 더 예민해져야 하고, 날이 날이니만큼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말이 누구에게 ‘칼’이 되는지 다 알기 어렵지만, 공론장을 운영하는 언론은 “몰랐다”는 말로 쉽게 면책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젠더와 관련해 차별적 표현을 목록화해서 공유하듯, 일베 등이 쓰는 모욕적인 용어도 뉴스룸에서 공유하고, 편집국 구성원이 집단지성을 발휘해 걸러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래도 남는 고민은 그런 혐오와 차별의 말들에 언론이 어느 정도 시선을 주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 가장 책임이 크고, 비난받아야 할 이들은 일베와 같은 조롱꾼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염시킨 혐오와 모욕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다투는 것을 보며 큰 효능감을 느낄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상으로 쓰는 표현이라면 그들의 의도에 일부러 관심을 주지 않는 것도 대응법일 것이다. 한겨레 편집국이 이번에 ‘중력’이 들어간 온라인 제목을 수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 것도 그래서이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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