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홍인혜 ㅣ 시인
모종의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던 지인이 있다. 그가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하며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감각으로 사는 거였어?” 고작 알약 몇 알에 그의 삶을 헤집던 문제들이, 그의 정서를 습격하던 감정들이 으르렁거림을 멈추고 유순해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작은 화학물질 알갱이가 이토록이나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오다니 신기했다. 우리는 입을 모았다. “인간도 결국 일종의 기계장치구나.” 그건 그동안 내 기분, 정서, 감정이라 여겼던 많은 것이 실제로는 특정 화학물질이 이끌어낸 하나의 작용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만 보아도 당분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카페인을 섭취하면 불안해진다. 과학 기사를 보면 ‘행복’이라는 정서도 결국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의 영역이고, 심지어 세로토닌은 대부분 뇌가 아닌 장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어제의 식단이 오늘의 행복을 좌우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내가 느끼는 것이 내게 깃든 영혼의 울림이나 우주적인 에너지에의 공명이 아니라 그저 화학작용의 결과치에 불과하다니. 그 와중 나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다. 근래 동영상이나 음악 등 구독 서비스를 몇 늘렸는데 거기에서 내 취향을 예측해 추천해준 작품들이 실제 나의 구미에 착 붙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튜브에서 요리 영상 몇개를 보았더니 가사 노하우 영상을 보여주고, 이것이 구두 수선 영상으로 이어지더니 결국 낡은 금속제품의 녹을 벗기는 영상까지 가는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뿐인가, 음악의 경우, 좋아해왔던 음악에 하트 몇개를 찍었더니 이런 노래는 어떠냐며 몇장의 앨범을 눈앞에 내미는데 못 이기는 척 들어봤더니 귀에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예전에는 새로운 가수를 알게 되는 과정이 우연히 손에 넣은 먼지 낀 앨범이라거나, 버스에서 귀에 걸린 라디오 신청곡이라거나, ‘네 생각이 나서’로 이어지는 친구의 추천이었는데, 그런 낭만 따위 일절 없어도 나는 일평생 수집해온 취향의 상자 몇배의 새로운 음악을 발굴했다. 이는 숫제 취향의 컨테이너였다.
이 사실 앞에 다소 실망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독특한 발생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의 취향 역시 섬세하게 조탁해온 수십 해의 레이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알고리즘의 결과였다. 알고리즘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출력을 유도해내는 규칙의 집합’이라는 딱딱한 설명이 나왔다. 말하자면 ‘택배를 보낸다’는 행위에서 포장을 하고, 주소를 쓰고, 접수를 하는 등 차곡차곡 이어지는 과정을 정해진 룰대로 해나가는 것이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뇌 안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규칙적인 연산도 알고리즘이라는 것인데,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패턴이 있다는 것이고, 그를 헤아리면 이런 분석과 예측이 가능해진다. 덕분에 지금도 에스엔에스에 접속하면 그대로 내 옷장에 넣어도 될 법한 옷의 광고가 뜨고, 오티티 서비스를 열면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90%라는 영화가 나타난다.
나의 취향은 데이터 분석으로 추측 가능한 결과값이었고, 행동 패턴 역시 부처님이 아닌 인공지능(AI)의 디지털 손바닥 안이었으며, 이를 생각하면 찾아오는 미묘한 실망감도 뇌에서 분비되는 특정 물질의 작용이겠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나’인가. 나의 선택에는 나의 의지가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당신은 이 기사를 어떻게 읽게 되었는가.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