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언제부터인가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이 눈에 자주 띈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어떤 잘못이 있다고 추측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는 듯한데, 의심이라는 말도 거북하지만 그 앞에 합리적이라는 말이 붙으니 숨이 턱 막힌다. 합리성을 선점, 독점하여 의심에 대한 반박을 비합리적이라고 몰아붙이려는 비합리적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또 입을 다물고 있으면 합리성에 굴복한 것이고 그로써 잘못은 입증되었다고 비합리적인 선언을 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도구가 되었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지만 이 정도면 거의 무기 수준인 듯하다.
이 무기는 어디에서 만들었을까? 혹시 데카르트일까? 그래서 우리가 이 말 앞에서 더 주눅이 드는 걸까? 그러나 데카르트가 합리주의의 원조인지는 몰라도, 이런 유의 의심에 합리성을 동원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의 의심은 기존 통념이나 믿음을 부정해보는 것이었고,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는 쪽으로 기능했다.
그렇다면 범죄와 관련이 있는 법 쪽에서 나왔을까? 형사소송법에는 “범죄 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절이 있고, 경찰의 규칙에는 “범죄 관련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배제될 때까지 사인 및 사망 경위를 수사하여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이 인용문들의 ‘합리적 의심’은 처음에 말한 의심과 모양만 같을 뿐 알맹이는 다르다. 처음에 말한 의심은 ‘reasonable suspicion’이고 인용한 의심은 ‘reasonable doubt’다. 데카르트의 의심도 doubt다. 굳이 외국어를 끌어들인 것은 적어도 두번째 합리적 의심은 물을 건너온 개념이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유죄 확정 과정에서 법적 입증의 수준은 대체로 육감, 합리적 의심, 상당한 근거 순서로 엄격해지며, 마지막으로 합리적 의심의 배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도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이것은 우리가 통상 suspicion과 doubt를 모두 의심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나 둘은 다른데, 그것은 I suspect that’s true와 I doubt that’s true라는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은 그게 사실이라고 의심하는 것이고, 뒤는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reasonable doubt는 유죄라는 주장에 대한 의심으로서 무죄 추정 원칙으로 연결된다. 데카르트의 의심과 마찬가지로 인간 해방에 기여한 의심이다.
반면 유죄를 추정하는 의심은 reasonable suspicion인데, 원래 이것은 국가권력의 수색·체포·압수를 막는 미국 수정헌법 제4조를 비켜가려는 표현이다. 즉 부당하지(unreasonable) 않은 의심이 있으면 구금이나 수색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이며, 주로 현장 근무 경찰관에게 국한해서 적용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도무지 합리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합리성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이 합리성은 얼마든지 자의적일 수 있고 또 온갖 편견에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현장 근무 중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데릭 쇼빈의 재판에서도 그가 합리적인 경찰관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합리적 의심이 나왔을까? 그보다는 원래 무죄 추정이란 의미로 도입되었지만, 언어의 혼란 때문에 모호하게 사용되다가 어떤 집단적 심리와 만나면서 정반대의 의미로 건너가버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물론 유래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왜 우리는 지금 인류가 간신히 성취한 합리적 의심은 법조문에 묻어두고 퇴행적인 합리적 의심은 일상적 표현으로 애용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