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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우리 동네 수영장의 물이 빠졌다 / 김남일

등록 2021-05-03 18:18수정 2021-05-04 02:38

김남일 ㅣ 디지털콘텐츠부장

5월4일이 함께하길.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팬들에게 이날은 ‘스타워즈의 날’이다. 영화 속 제다이와 저항군이 인사말로 쓰는 “포스가 함께하길”(May the force be with you)을 5월4일(May the fourth)로 읽는 말장난에서 시작됐다. 미국 팬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만, 이 말장난의 원조는 영국으로 보인다. <스타워즈> 개봉 2년 뒤인 1979년 5월4일 마거릿 대처가 총리가 되자, ‘스노비시’ 보수당이 일간지에 낸 축하광고 문구가 ‘May The Fourth Be With You, Maggie’였다. 토리당의 근엄한 후예들마저 미국 대중문화가 뿜어내는 강력한 포스에 간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온갖 외계인과도 함께하는 영화적 즐거움을 정작 다양한 지구인과 나누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2015년 디즈니가 리부트한 스타워즈 시리즈는 처음으로 백인 여성과 함께 아프리카계 남성, 아시아계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일부 백인 남성 팬덤을 중심으로 ‘스타워즈 세계관을 망친다’는 주장이 나왔다. 보이콧, 인종차별, 사이버폭력이 시작됐다. 2017년과 2019년 제작한 속편에서 두 사람이 맡았던 배역은 축소되거나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시대였다. ‘스타워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극렬 스타워즈 팬덤은 포스의 어두운 면, 정치 양극화한 미국 사회를 영화 끝자락 쿠키로 남겼다.

수영장이 함께하길. 오래전 은하계 저 멀리 미국은 기가 막힌 수영장의 나라였다고 한다. 20세기 초부터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으로 도시와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공공수영장을 짓기 시작한 결과였다. 미 전역 2000개 넘는 공공수영장이 지역 백인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줬다.

1950~60년대 민권운동이 거세게 일었고 인종차별 폐지와 흑백통합 정책이 시작됐다. 백인 전용이던 공공수영장은 이제 모두에게 개방돼야 했다. 백인공동체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전국에서 가장 컸다는 세인트루이스 공공수영장은 한번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백인들은 이 수영장 물을 모두 빼버리는 것으로 흑백통합에 대응했다. 말 그대로 수영장 풀의 마개를 뽑아버린 것이다. 흑인들이 함께 수영하는 꼴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는 풀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렸고, 수영장이 들어선 공원 전체를 폐쇄한 곳도 있었다. 민간업체에 팔아버리기도 했다. 찰랑이는 물속에서 반짝이는 햇볕과 스몰토크를 즐기던 백인들의 낙원, 미국 공공투자의 상징 공공수영장은 그렇게 급속히 사라졌다고 한다. 백인이라고 맨땅에 헤엄칠 방법은 없다. 돈 있는 백인은 민간업체가 운영하는 멤버십 수영클럽에 들어갔고, 그렇지 못한 백인은 흑인과 마찬가지로 수영할 곳을 잃었다.

이 황당한 미국사에 ‘수영장 물빼기 정치’(drained-pool politics)라고 이름 붙인 책이 얼마 전 미국에서 출간됐다. 왜 미국인은 질 좋은 공교육과 보편적 건강보험, 사회안전망을 가질 수 없게 됐는지 따라가보니, 다른 인종이 무언가를 갖게 되면 백인은 그걸 잃게 된다는 이상한 제로섬 믿음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영장을 함께 썼다면 기분 좋은 한낮의 수영장을 아무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인종주의는 결국 모두에게 그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상황에 대입하면 어떤가. 딱 들어맞지 않지만 사다리 걷어차기 정도가 아닐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들은 소수인데 아직 사다리에 오르지 못했거나, 사다리 탈 기회조차 없는 이들끼리 제로섬을 신봉하는 것은 아닌가. 로맨스도 불륜도 더 이상 사다리가 필요 없는 이들의 전유물이 됐는데 다들 느긋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것 아닌가.

5월이다. 무엇이 함께하면 좋을까. 노동이 함께하길, 휴식이 함께하길, 미래세대와 함께하길, 광주정신으로 미얀마와 함께하길, 노무현 정신이 함께하길.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나에게 너무 거창하고 버겁다면 그저 5월의 햇볕과 맑은 공기가 함께하길.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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